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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글쓴이  :   피라밋 (2009.03.24 - 16:00)
  [디펙 쵸프라] 의식과 존재, 대상과 우주, 시간의 실체, 변화와 현실
1. 관찰자로부터 독립적인 객관적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실재라고 받아들이는 세계는 딱 꼬집어 말할 수 있는 성질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떤 물건은 크고 어떤 것은 작고, 어떤 것은 단단하며 어떤 것은 부드럽다. 그러나 이 중의 어떤 성질도 우리 자신의 인식을 벗어나서는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한다. 예컨대 접는 의자와 같은 어떤 물체를 가정해 보자. 우리에게는 그 의자는 그리 큰 것이 아니다. 그러나 개미에게는 그것은 어마어마하게 크다.

우리에게는 의자가 단단해 보이지만, 중성미자(neutrino)는 그 속을 거침없이 지나갈 것이다. 왜냐하면 아원자(亞原子) 입자에게는 의자의 원자들이 서로 수마일씩이나 떨어져 있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의자가 가만히 놓여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만약 당신이 외계의 어느 지점에서 그것을 본다면 의자는 지구상의 모든 것들과 함께 돌면서 시속 수천 마일의 속도로 우리의 눈앞을 지나갈 것이다.

마찬가지로 단지 인식을 바꾸기만 함으로써 우리가 의자에 대해서 묘사할 수 있는 다른 어떤 성질도 완전히 바꾸어 놓을 수가 있다. 예컨대 의자가 붉은색이라면 초록색 안경을 쓰고 봄으로써 검은색으로 보이게 할 수도 있다. 만일 의자의 무게가 2.5킬로그램이라면 그것을 달 위에 가져가 1킬로그램도 채 안 나가게 만들 수도 있고, 아니면 밀도가 큰 행성의 중력장 속에 가져다 놓음으로써 수십만 킬로그램의 무게로 만들 수도 있다.

물질세계에서는 절대적인 속성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저 밖에’ 어떤 독립적인 세계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부터가 잘못된 일이다. 우주란 그것을 감지하는 감각기관의 반영일 뿐이다. 인간의 신경계는 우주 속에 진동하고 있는 총 에너지의 10억 분의 1도 안되는 지극히 미소한 부분만을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다. 박쥐나 뱀과 같은 다른 동물들의 신경계는 우리의 세계와 공존하고 있는 또다른 세계를 반영한다. 박쥐는 초음파의 세계를 감지하며, 뱀은 적외선의 세계를 감지한다. 두 세계 다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진정으로 ‘저 밖에’ 존재하고 있는 것은 다만 인식자인 우리가 해석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정형화되지 않은 원시 데이터뿐이다. 우리는 우리의 감각을 사용하여, 물리학자들의 말하는 ‘지극히 불명확하고 멀건 양자의 수프’를 굳혀서 3차원의 고형 우주를 만드는 것이다. 영국의 뛰어난 신경학자인 존 에클스(John Eccles) 경은 다음과 같이 놀랍지만 반박할 수 없는 단언으로써 감각이라는 환상을 통찰하고 있다.

“나는 여러분이 자연의 우주에는 어떤 색깔도, 어떤 소리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색깔이나 소리와 비슷한 것, 즉 직물, 문양, 아름다움, 향기 등등의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간단히 말해서, 우리가 현실의 기반으로 삼고 있는 어떤 객관적 사실도 본질적으로는 무효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혼란스럽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이 속에는 ‘단지 당신의 인식을 바꾸기만 함으로써’ 당신의 우주 - 당신의 몸을 포함한 -를 당신이 변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믿기지 않는 해탈이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몸 속에서 엄청난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미국과 영국에서는 65세에 맞게 되는 정년퇴직이 제멋대로 한 사람을 사회에 더 이상 쓸모가 없는 인간으로 만들어 버린다. 65세가 되기 전날까지만 해도 한 직장인은 노동과 가치로써 사회에 기여하지만 그날 이후로 그는 사회의 피부양자가 된다.

의학적으로 이러한 인식적 전이의 결과는 비참하다. 퇴직이후 몇 년 동안에 심장마비와 암의 발병률이 치솟고, 퇴직하기 전에 건강했던 사람들이 조기에 죽음을 맞는다. 소위 ‘조기은퇴성 사망’이라는 이 증후군은 자신이 더 이상 쓸모가 없는 존재라는 인식에 기인한다. 이것은 단지 하나의 인식일 뿐이지만 그것을 굳게 믿는 사람에게는 질병을 일으키고 사망하게 만들기 충분하다. 비교한 바에 의하면, 노년층이 사회의 어엿한 구성원으로서 받아들여지는 사회에서는 노인들이 지극히 원기왕성하다. 그들은 미국의 노인네들로서는 정상적으로 할 수 없는 굽히기, 들기, 오르기 등을 거뜬히 해낸다.

간의 표피세포와 같은 오래된 세포를 고배율 현미경으로 살펴보면, 그 광경은 마치 전쟁터처럼 황폐화되어 있다. 섬유질이 이러 저리 얽혀 있고 지방질 노폐물과 처리되지 않은 순환노폐물이 보기 흉한 덩어리로 엉켜 있다. 리포푸신(lipofusin)이라 불리는 암황색 색소가 세포내부의 10 내지 30퍼센트까지 축적되어 더럽혀져 있다.

이 황폐한 광경은 아세포 기능의 이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물질적인 렌즈가 아니라 정신적인 렌즈로 들여다보면, 이 오래된 세포들이 마치 그 사람의 경험이 기록된 지도와 같음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 즐거움을 가져다 준 일들과 함께 우리를 괴롭힌 일들이 거기에 각인되어 있다.

의식 층에서는 오랜 전에 잊혀진 일들이 마치 감춰진 컴퓨터 마이크로칩처럼 여전히 외부로 신호를 보내어 우리를 초조하게 하고 긴장하게 하며 지치고 근심스럽고 후회스럽고 의심스럽고 실망스럽게 만든다. 이러한 반응들은 심신의 경계막을 넘나들면서 우리의 일부가 된다. 오래된 세포 속의 독성 노폐물 덩어리들이 누구에게나 같은 형태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유전적인 차이가 거의 없는데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이 나타난다. 70세에 이를 즈음이 되면 당신의 세포는 독특한 형태를 띠게 될 텐데, 그 형태는 당신이 자신의 신체조직과 내장기관에 대사작용으로 변화시키고 처리시킨 독특한 경험을 거울처럼 반영하는 모습이 될 것이다.

혼돈스럽고 거칠게 진동하는 ‘양자의 수프’를 다루어서 의미있고 질서있는 현실의 단편들도 만들 수 있게 되면 무한한 창조의 가능성이 열린다. 그러나 이러한 가능성은 오직 당신이 그것을 알고 있을 때에만 존재한다. 당신이 이 책을 읽고 있는 동안에도, 당신 의식의 거의 대부분이 당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몸을 만들어 내는 일에 종사하고 있다. 소위 자율신경계는 당신의 의식을 빠져나간 기능들을 통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가 멍한 상태로 길을 걸어가더라도 뇌 속의 자율신경 중추는 여전히 위험한 순간을 살펴서 긴장반응을 발동시킬 태세를 갖추고 외부세계에 대처하고 있다. 우리가 의식하지 않는 가운데 수많은 일이 행해지고 있다. 숨쉬고, 소화시키고, 새로운 세포를 키우고, 손상된 오래된 세포를 고치며, 독성을 순화시키고, 호르몬의 균형을 유지하며, 지방을 혈당으로 바꿈으로써 저장된 에너지를 변환시키고, 눈동자의 조리개를 조절하고, 혈압을 높이고 낮추며, 체온을 일정하게 유지하고, 걷는 동안에 균형감각을 유지하고, 가장 많은 일을 하고 있는 근육으로 혈액을 보내 주고, 주변의 소리와 움직임을 감지하는 등의 일이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이 자율적인 과정이 노화현상에 아주 큰 몫을 담당하고 있다. 나이가 먹어갈수록 이러한 기능들을 조절하는 능력이 떨어져 가는 것이다. 한평생 무의식적인 생활을 이어가면 수많은 노후작용이 일어나고, 한평생 의식적으로 활동하면 노화를 예방할 수 있다. 신체의 기능을 자동운전 상태로 내버려두는 대신에 의식적으로 주의를 기울이는 행위, 그 자체가 당신이 어떻게 나이를 먹느냐에 변수가 될 것이다.

심장박동과 호흡으로부터 소화와 호르몬 조절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른바 자율기능들은 의식적으로 통제할 수가 있다. 바이오피드백(biofeedback)과 명상의 시대가 우리에게 이것을 가르쳐 주었다. 여러 가지 일 중에서도, 예컨대 심신건강 연구실에서는 심장질환자가 의지로서 혈압을 내리거나, 위궤양 환자가 위산의 분비를 줄이는 훈련을 받고 있다. 이러한 능력을 노화현상에 활용하지 못할 이유가 있겠는가? 구태의연한 인식을 새롭게 바꾸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앞으로 알게 되겠지만, 우리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자율신경계에 영향을 미치는 기법은 얼마든지 있다.


2. 우리의 신체는 에너지와 정보로 이루어져 있다.

과거의 패턴을 변형시키기 위해서는 그것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알아야만 한다. 우리의 몸은 분자와 원자로 쪼개어지는 고형의 물질로 이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양자물리학은 모든 원자의 99.9999퍼센트가 텅 빈 공간이며, 실제로는 진동하는 에너지의 덩어리인 아원자 입자가 이 공간 속을 빛의 속도로 돌아다니고 있다고 말한다. 이 진동은 무작위적이고 의미없는 것이 아니라 정보를 지니고 있다. 그리하여 한 덩어리의 진동은 수소 원자의 정보를 지니고, 또 다른 덩어리의 진동은 산소 원자의 정보를 지닌다. 사실 모든 원소들이 하나의 고유한 정보이다.

정보는 추상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는 우주와 그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추상적인 것이다. 인체의 물리적 구조를 궁극적인 근원으로 추적해 가면 분자가 원자로, 원자가 아원자 입자로, 아원자 입자는 텅 빈 공허 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유령 같은 에너지로 꽁무니를 감추어 버려서 마침내는 막다른 골목에 부딪히게 된다.

신비스럽게도 이 공허에는 어떤 정보가 표현되기도 전에 이미 우리의 기억 속에 소리없이 존재하는 것처럼, 양자의 장은 표현되지 않은 형태로 온 우주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수 십억의 은하계가 이 문장 끝의 마침표보다 수백만 배나 작은 공간 속에 압축되어 있었던 대폭발(Big Bang)의 순간 이래로 늘 그래 왔었다. 그러나 무한히 작은 그 점 이전에도 우주의 구조는 나타나지 않은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다.

우리의 몸을 포함한 우주의 근본 질료는 비질료(non-stuff)이다. 그러나 그것은 범상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생각하는 비질료이다. 모든 원자 내부의 공허는 보이지 않는 지능으로 맥동하고 있다. 유전학자들은 이 지능이 본래 DNA 속에 들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생각을 편하게 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DNA가 정보화된 자신의 지능을 쌍둥이 격인 RNA에 전해 주고, RNA는 나아가서 세포 속으로 들어가 수천 개의 효소들에게 그 지능의 조각들을 전달해 주고, 그러면 효소는 그 특정한 지능의 조각을 단백질을 만드는 데에 사용함으로써 생명이 전개된다. 이러한 과정의 모든 순간에 에너지와 정보가 교환되어야 하며, 이것이 없이는 생명 없는 물질로부터 생명이 생겨나지 않는다.

인체는 주로 글루코스나 혈당의 형태로 세포에 전달되는 당분을 연소함으로써 에너지를 뽑아 낸다. 글루코스의 화학구조는 우리가 먹는 설탕인 자당(sucrose)과 매우 가깝다. 하지만 설탕을 태운다고 해서 복잡하고도 정교한 구조를 가진 살아있는 세포를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시꺼먼 숯덩어리와 물과 이산화탄소의 흔적만이 남을 뿐이다.

물질대사는 단순한 연소과정 이상의 어떤 것이다. 각설탕 속에 비활성 상태로 들어 있는 당분이 그 에너지로써 생명을 지탱하는 것은 인체 세포가 그것에 새로운 정보를 불어넣기 때문이다. 당분은 그 에너지를 예컨대 신장, 심장, 혹은 뇌의 세포에 줄 수 있다. 이 세포들은 모두가 자신만의 독특한 형태의 지능을 지니고 있다. 심장세포의 율동적인 수축운동은 뇌세포의 전기적 방전작용이나 신장세포의 나트륨 교환작용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이 지능의 풍부성과 다채로움은 놀라운 것이지만, 그 밑바닥에는 온 신체가 공유하고 있는 단일한 지능이 있다. 이 지능의 흐름이 우리를 살아 있게 하며, 사망의 순간에 이 흐름이 끊기면 우리의 DNA 속에 저장된 그 모든 지식도 쓸모없게 된다. 우리가 나이를 먹어 감에 따라 이 흐름은 다양한 방법으로 손상된다.

면역계통과 신경계통, 내분비계통의 특유한 지능이 모두 쇠퇴하기 시작한다. 생리학자들은 이 세 가지 계통이 인체의 가장 중요한 제어기능을 담당하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의 면역세포와 내분비선은 뉴런과 마찬가지로 뇌의 신호를 받아들이는 수용체(receptor)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확장된 뇌와도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노화란 단순히 우리의 잿빛 물질덩어리 속에 한정된 하나의 질병으로 볼 수가 없는 것이다. 면역계통이나 내분비계통의 지능이 상실되면 온몸의 노화가 진행되는 것이다.

이 모든 일이 보이지 않고 드러나지 않는 차원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말기 단계까지 진행되어 신체적인 증상으로 나타날 때까지도 그 손상은 눈에 띄지 않는다. 오감은 노화를 일으키는 수십 억의 양자의 교환작용을 느낄 수 있을 만큼 깊이 침투해 들어가지 못한다. 그 변화의 속도는 너무나 빠른 동시에 너무나 느리다. 각각의 화학반응이 일어나는 데에는 10,000분의 1초도 걸리지 않기 때문에 너무 빠르다는 것이며, 여러 해가 지나도록 그 누적된 효과가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너무 느리다는 것이다. 이러한 반응들에는 한 개의 원자보다 수백만 배 작은 규모의 정보와 에너지가 개입된다.

인체가 단순한 물질이라면 노화에 의한 쇠약을 불가피한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물질은 엔트로피(entropy), 즉 질서있는 체계로부터 점점 무질서하게 되어 가는 경향성의 희생물이기 때문이다. 엔트로피는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폐차장에서 녹슬어 가는 고물차와 같은 것이다. 엔트로피는 잘 돌아가던 기계를 찌그러진 고물로 망가뜨려 놓는다. 이러한 과정은 결코 반대로는 일어나지 않는다. 녹슨 고철 무더기가 저절로 재조립되어 새 차로 만들어지지는 않는 것이다. 그러나 엔트로피의 법칙이 지능에까지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보이지 않는 부분은 세월의 약탈에 영향받지 않는 것이다. 현대과학은 이 모든 것이 의미하는 것을 지금 막 밝혀 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오랜 세월 동안 신체의 젊음을 유지해 온 스승들의 영적인 전통 속에 이미 수천 년동안 전해져 내려왔던 것이다.

인도와 중국, 일본, 그리고 그보다 좀 희귀하긴 하지만 서양의 기독교권에서도 자신의 진정한 본질이 지능의 한 흐름임을 깨달은 현자들을 배출해 왔다. 이 흐름을 유지하고 해가 갈수록 풍부하게 함으로써 그들은 자연계의 심층적 차원에서 엔트로피를 극복해 냈다. 인도에서는 이 지능의 흐름을 프라나(흔히 ‘생명력(氣)’이로 번역된다)라고 한다. 이것은 의지로써 증가시키거나 이곳 저곳으로 움직일 수 있으며, 육신을 젊고 순조롭게 유지하도록 조종할 수 있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이 프라나를 접하고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은 우리 안에 있다. 요기(yogi)는 다름아닌 의식의 집중을 이용하여 프라나를 움직인다. 심층적 차원에서 프라나와 의지의 집중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생명은 의식이며 의식이 곧 생명이다.


3. 몸과 마음은 떼놓을 수 없는 하나이다.

지능은 그것을 가리고 있는 물질이라는 가면보다 훨씬 더 융통성이 있다. 그 자신을 사념으로 표현할 수도 있고 분자로써 표현할 수도 있는 것이다. 두려움과 같은 기본적인 감정은 하나의 추상적인 느낌으로 묘사될 수도 있고, 혹은 눈에 보이는 아드레날린 호르몬의 분자로 묘사될 수도 있다. 느낌이 없이는 호르몬도 없으며, 호르몬이 없이는 느낌도 없다.

그와 마찬가지로 통증을 전달하는 신경신호가 없으면 통증도 없고, 통증의 수용체에 꼭 들어맞아서 통증의 신호를 차단시키는 엔도르핀(endorpin)이 없으면 통증으로부터 해방될 수도 없다. 심신상관 의학(Mindbody medicine)이라고 불리는 혁명은 이 단순한 발견 위에 근거한 것이다. 생각이 가는 곳에 화학물질이 동반된다. 이러한 통찰이, 예컨대 남편을 최근에 사별한 여성들에게 유방암이 일어나는 확률이 왜 두 배나 더 높은지, 또 오랫동안 우울에 빠져 있던 사람들이 병을 얻는 확률이 왜 네 배나 더 높은지 등을 이해하는 데 강력한 도구가 되었다. 두 가지 경우 모두 정신적인 압박상태가 질병을 일으키는 생체화학물질로 변환된 것이다.

나의 임상 경험에서도, 쥐어짜는 듯이 숨막히는 통증을 유발하는 심장계통의 대표적인 질환인 협심증 환자가 두 사람 있었는데, 한 사람은 통증을 완전히 무시하거나 전혀 느끼지도 않고 달리기와 수영, 심지어는 등산까지 즐기는데 비하여 다른 사람은 팔걸이 의자에서 일어나려고만 해도 거의 까무러칠 정도의 통증에 시달리는 사례를 목격할 수 있다.

나는 본능적으로 이 두 사람의 신체적인 차이를 조사해 볼 것이지만, 그것은 발견할 수도 있고 전혀 발견 못할 수도 있다. 심장병 전문의들은 세 개의 관상동맥 중에서 최소한 하나가 50퍼센트 이상 막혔을 때 협심증의 통증이 나타난다고 보고 있다. 이렇게 혈관이 막히는 것은 대부분이 죽은 세포, 응고된 혈액, 지방질이 낀 혈소판 등이 혈관내벽에 끼어서 이루어진 동맥경화의 형태이다. 그러나 50퍼센트라는 수치는 단지 어림짐작일 뿐이다.

어떤 협심증 환자들은 오직 관상동맥의 한 군데에만 혈행을 방해하는 작은 병변(病變)을 가지고도 통증으로 장애인이 되는 반면, 다른 환자들은 관상동맥을 85퍼센트까지 말고 있는 덩어리들을 여러 군데에 지니고도 마라톤 코스를 뛴다고 알려져 있다. (덧붙일 것은, 협심증은 반드시 어떤 물질이 낄 경우에만 발병되는 것은 아니다. 관상동맥에는 근육세포층이 붙어 있는데, 이것이 경련을 일으켜서 혈관이 닫혀 있을 때에도 박동하여 통증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개인데 따라 반응이 매우 다르다.)

심신상관 의학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나의 두 환자는 통증에 대한 각자의 서로 다른 해석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환자들이 자신의 상황에 대해 자신만의 특유한 낙인을 찍는다. 그리고 통증(혹은 기타의 증상)은 심신체계 속에서 작용하고 있는 과거의 모든 영향들과 상호작용한 다음에야 의식 속으로 떠오른다. 모든 사람이, 아니 같은 사람이라도 어떤 일에 항상 똑같은 반응을 보이는 경우는 없다. 통증의 신호는 다양한 용도로 변환될 수 있는 원시 데이터일 뿐이다.

장거리 달리기 같이 많은 체력을 소모하는 경기는 선수로 하여금 고통을 성취의 신호(‘고통 없이는 성취도 없다’라는 속담을 보라)로 해석하게끔 만들지만, 똑같은 고통이 다른 상황에서 주어지면 전혀 달갑지 않을 것이다. 육상 선수들은 자신을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코치를 존경하지만, 신병훈련소에서 그와 같은 훈련을 받으면 교관을 증오한다.

의학은 이제 막 심신의 상관관계를 치료에 이용하기 시작하고 있다. 통증 치료가 그 좋은 보기이다. 플라시보(placebo), 즉 가짜 약을 투여하면 30퍼센트의 환자는 정말 진통제를 투여한 것과 같은 진통효과를 경험한다. 그러나 심신의 상관효과는 이보다 훨씬 더 전일적(全一的)이다. 똑같은 가짜 약으로써 진통을 겪게도 하고, 위궤양 환자의 과다한 위산분비를 멈추게도 하며, 혈압을 낮추기도 하고, 항암제 역할도 한다. (설탕으로 만든 약을 환자에게 주면서 강력한 항암제라고 믿게 하여 머리가 빠지고 구토증이 나는 등 화학요법이 일으키는 모든 부작용이 나타나게 할 수도 있으며, 생리식염수 주사로 말기의 악성 종양을 실제로 완화시킨 예도 있다.)

약효가 없는 동일한 약물로써 이처럼 전혀 다른 반응을 이끌어 낼 수가 있으므로, 마음에 적당한 암시만 주면 인체는 ‘그 어떠한’ 생화학 반응이든지 만들어 낼 능력이 있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가 없다.

가짜 약 그 자체는 아무런 의미도 가지고 있지 않다. 플라시보 효과를 나타내는 힘은 다름아닌 암시의 힘이다. 이 암시가 인체가 자신을 치유하려는 의지로 변환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짜 약으로 환자를 속이는 짓을 그만두고, 바로 그 ‘치유의 의지’로 접근하는 것이 어떨까? 만약 우리가 늙지 않으려면 의지를 효과적으로 발동시킬 수만 있다면 인체는 그것을 자동으로 실행할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매우 흥미로운 증거를 가지고 있다. 노인들에게 가장 치명적인 병 중의 하나는 파킨슨병이라는 신경장애로서, 근육운동을 조절할 수 없어서 걷기와 같은 신체동작이 극도로 느려지다가 결국은 전혀 움직일 수가 없을 정도로 몸이 경직되게 만드는 병이다.

파킨슨병은 도파민(dopamin)이라는 뇌의 매우 중요한 화학물질이 알 수 없는 이유로 고갈되는 것이 원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한편 어떤 종류의 약물에 의해 도파민을 생산하는 뇌세포가 파괴되어서 일어나는 파킨슨병 증상도 있다. 이 두번째 형태의 증상의 심화되어 거동이 거의 불가능한 어떤 환자를 가정해보자. 그는 안간힘으로 겨우 한두 걸음을 옮기고는 다시 동상처럼 뻣뻣이 얼어붙는다.

그러나 바닥에다 금을 그어 놓고 “이 금을 밟아 보세요.”하고 말하면 그 사람은 마치 기적과도 같이 그 금 위에 설 수가 있다. 도파민을 만드는 것은 전적으로 자율적인 기능이며, 저장된 것은 완전히 소모되었다는 사실(거의 뇌가 다리의 근육에게 한 걸음 더 움직이도록 신호를 보내지 못한다는 사실로써 알 수 있는 것처럼)에도 불구하고 단지 걸음을 걷고자 하는 의지에 의해서 뇌가 깨어난 것이다.

그 사람은 몇 초만 지나면 다시 얼어붙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시 그에게 마음 속으로 금을 긋고 그것을 밟아 보라고 하면 그의 뇌는 반응을 보일 것이다. 부연하자면, 노인들의 쇠약이나 활동력 감퇴는 대부분의 경우 단지 휴지상태일 뿐이다. 목적의식을 가지고 활동적으로 생활하고자 하는 의지만 재확인시켜 주면, 많은 노인들이 운동능력과 체력과 민첩성과 정신반응을 극적으로 개선시킬 수 있다.

의지는 의식집중의 적극적인 동업자이다. 의지는 우리가 자동적인 과정을 의식적인 과정으로 변환시키는 방법이다. 거의 대부분의 환자가 간단한 심신상관관계 훈련을 이용해서 빠른 맥박과 천식성 기침, 뭔지 모를 불안감을 몇 번만에 좀더 정상적인 반응으로 바꾸어 놓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자신의 통제 밖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일도 적절한 기법을 이용하여 다시 통제권 안으로 가져올 수가 있다. 이것이 노화에 대해 시사하는 의미는 매우 크다.

예컨대 ‘나는 정력과 활동력을 나날이 증진시키고 싶다’는 식의 의지를 사고과정에 주입함으로써, 활동에 표현되는 에너지의 양을 결정하는 대뇌중추에 통제력을 행사하기 시작할 수 있다. 나이가 들어 활동력이 감퇴하는 것은 대부분이 그렇게 감퇴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기대’한 결과이다. 그들은 자기도 모르게 자기패배적인 의지를 강한 신념의 형태로 심어 놓은 것이다. 그리하여 심신의 상관관계가 이러한 의지를 자동으로 실행하게 된다.

과거에 우리가 지녔던 의지들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구시대의 프로그램을 만든다. 사실은, 의지의 힘은 언제든지 다시 각성시킬 수가 있다.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서 당신의 의지를 사용하여 의식적으로 마음을 프로그래밍함으로써, 나이가 들기 전에 일찌감치 그와 같은 손실을 방지할 수가 있는 것이다.


4. 인체의 생화학작용은 의식의 산물이다.

낡은 패러다임이 지니고 있는 가장 중대한 한계 중의 하나는, 인체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설명함에 있어서 그 사람의 의식은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다는 전제이다. 그러나 질병의 치료는 그 사람의 신념, 추측, 기대, 그리고 자신에 대한 자아상을 또한 이해하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가 없다. 인체를 마음이 없는 기계로 보는 입장이 아직도 서양의학의 주류를 지배하고 있지만, 그와는 반대되는 의심할 수 없는 증거들이 있다. 암이나 심장질환으로 사망하는 비율은 아무래도 심리적인 압박감을 가진 사람들이 더 높고, 목적의식이 강하고 행복한 사람들은 더 낮다.

최근 몇 해 동안 이루어진 의학연구 결과 중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의 하나는 스탠퍼드 대학의 정신의학자인 데이비드 스피겔(David Spiegel)이 행한 실험이다. 그는 환자의 마음상태가 암의 극복과정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했다. 그는 많은 의사들과 마찬가지로 환자의 신념과 태도에 중요한 의미를 두는 것이 이로운 점보다는 해로운 점이 더 많으리라고 느꼈다. 왜냐하면 ‘암을 일으킨 원인은 나에게 있다’는 식의 생각은 죄의식과 자기비판을 일으킬 것이기 때문이었다.

스피겔은 유방암이 상당히 진전된 86명의 여성(그들의 병은 관행요법으로는 더 이상 손을 쓸 수가 없는 상태였다)들을 대상으로, 그들 중의 반수에게 매주 자기최면법 강의와 결합된 정신요법을 행했다. 어느 모로 보나 이것은 최소한의 개입이다. 일주일에 한 시간, 그것도 여러 명의 환자가 함께 하는 요법으로써 죽음이 불가피하게 된 말기 증상의 병과 어떻게 싸울 수가 있었겠는가? 결과는 뻔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실험 대상자들을 10년 동안 추적해 본 스피겔은 요법을 받은 그룹이 요법을 받지 않은 그룹보다 평균 두 배나 오래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더욱 놀라운 것은, 최근까지 단지 세 명만이 살아 있었는데, 그들 모두 요법을 받은 그룹에 속한다는 사실이다. 이 연구결과는 연구자가 그 효과를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것이라서 더욱 놀라운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연구자들한테서도 이와 비슷한 연구결과가 쏟아져 나왔다.

예일 대학의 젠센(M. R. Jensen)이 보고한 1987년의 신중한 연구결과에 의하면, 감정을 억누르고 절망감에 빠지고 분노나 두려움, 기타 부정적인 감정을 발산하지 못하는 성격을 지닌 여성들에게는 유방암이 빠르게 퍼져 나간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류머티스 관절염이나 천식, 난치성 통증, 그리고 기타의 장애 증상에 대해서도 이와 비슷한 발견이 보고되었다.

낡은 패러다임에 빠져 있는 의사들은 이러한 연구결과에 대해서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통찰력이 번득이는 저서 <의학과 의미(Medicine and Meaning)>에서 래리 도시(Larry Dossey)가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의학 회보나 의과대학 강단에서 끊임없이 설교되고 있는 지배적 교훈은 ‘전래의 병리학’만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며, 느낌, 감정, 태도 등은 한갓 들러리일 뿐이라는 주장이다.

새로운 패러다임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감정이란 외딴 정신의 공간 속을 스치듯 지나가는 사건이 아니라 의식의 표현이며 생명의 근본적인 질료라는 사실이다. 모든 종교 전통 속에서 생명의 숨결은 곧 영혼이다. 영혼을 고양시킨다거나 저하시킨다는 것은 인체가 반드시 반영해야 할 근본적인 어떤 것을 의미한다.

의식은 노화현상에 매우 큰 차이를 가져온다. 고등한 생명 형태를 지닌 모든 종이 노화하지만, 오직 인간만이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현상을 인식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인식을 다시 노화 자체로 재번역한다. 늙어가는 것에 절망을 느끼기 때문에 한층 더 빨리 늙어가는 것이다. 반대로 그것을 아량으로 받아들이면 육체적?정신적인 많은 불행을 막아낼 수 있다. ‘자신이 늙었다고 생각하는 만큼만 늙는다’는 속담은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생각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자연계의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에너지와 정보의 자극이다. 우리가 나무, 별, 산, 바다라고 부르는 에너지와 정보의 덩어리도 자연계의 생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생각은 한 가지 중요한 면에서 이와는 다르다. 자연계는 자신의 생각의 형태가 일단 정해지면 거기에 고정되어 버린다. 행성이나 나무와 같은 사물은 생겨나고 발달하고 쇠퇴하고 분해되는 자동적 단계의 성장 사이클을 따른다.

그러나 인간은 생명의 주기 속에 갇히지 않는다. 인식능력이 있음으로 해서 우리는 우리 내부에서 일어나는 모든 반응에 참여한다. 우리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을 때 문제가 일어난다. 마이클 탤보트(Michael Talbot)는 자신의 저서 <홀로그램 우주(The Holographic Universe)>라는 책에서 이것을 희랍 신화에 나오는 마이더스 왕에 빗대어 재치있게 이야기한다.

자기가 손을 대는 모든 것이 황금으로 변해 버리므로, 마이더스 왕은 사물의 실질적인 재질을 알 수가 없다. 물도, 밀알도, 살도, 깃털도, 모두가 그가 손을 대는 순간 단단한 금속으로 바뀌어 버린다. 이와 마찬가지 방식으로 우리의 의식은 양자의 장을 일상의 물질적 현실로 바꾸어 버리므로 우리는 양자적 현실 그 자체의 재질을 알 수가 없다. 오감을 통해서도 알 수 없고,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으로도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생각 또한 양자의 장을 바꾸어 놓기 때문이다. 생각은 공허의 무한한 가능성을 어떤 시공간적(時空間的) 사건으로 바꾸어 놓는다.

우리가 육체라고 부르는 것도 역시 특정한 시공간적 사건이다. 우리는 순전히 추상적인 잠재력을 고형의 물체로 바꾸어 놓은 마이더스의 손을 깨닫지 못하는 가운데, 육체의 물질성만을 경함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이 ‘의식을 의식하지’ 못하는 한, 육체를 바꾸어 놓는 자신의 행위를 깨닫지 못할 것이다.


5. 인식이란 학습된 현상이다.

만일 모든 인간이 어떤 경험에 대해서 똑같은 반응을 하게 되어 있다면, 의식의 힘은 우리의 삶에 아무런 변화도 주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은 분명히 일어날 리가 없다. 어떤 것에 대해서도 두 사람이 똑같은 인식을 공유하는 일은 없다. 당신 애인의 얼굴이 나의 가장 미운 적일 수도 있고, 당신이 좋아하는 음식이 나에게는 구역질나는 것일 수도 있다. 이러한 각 개인의 반응들은 반드시 학습된 것이다. 여기서 개인의 차이가 비롯된다. 학습 행위는 마음을 매우 활발히 사용하는 것으로, 신체에 매우 활발한 변화를 일으킨다. 사랑, 증오, 기쁨, 혐오 등의 인식은 신체에 서로 극단적으로 다른 방향의 자극을 준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의 몸은 우리가 태어난 이래로 배운 모든 해석방식의 육체적 산물인 것이다.

장기이식 수술을 받은 일부 환자들은 신장이나 간, 심장 등을 기증 받은 후에 괴이한 경험을 했다는 보고를 해 온다. 장기를 기증한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들은 기증자의 기억 속에 끌려들어 가기 시작한다. 사람의 체내에 다른 사람의 신체조직이 이식되면 그 사람의 대인관계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한번은 심장이식 수술을 한 어떤 여성이 잠을 자다 깨어났는데, 갑자기 맥주와 통닭을 먹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이 일어났다.

그녀는 깜짝 놀랐다. 전에는 그런 것을 먹고 싶다는 생각이 한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티미라는 젊은 남자가 나타나는 이상한 꿈을 꾸기 시작하고부터 그녀는 교통사고로 병원에서 죽은 심장 기증자의 신상을 조사해 보았다. 그녀가 그의 가족을 만나본 결과 교통사고로 죽은 사람이 티미라는 이름의 청년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가 맥주를 매우 즐겼으며 맥도널드에서 돌아오는 길에 사고를 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그녀는 깜짝 놀랐다.

이런 경우에 대해서는, 초자연적인 설명을 찾기보다 우리의 신체는 경험이 육체적 표현으로 변형된 것임을 확인시켜 주는 예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경험이란 우리가 ‘육화’시키는 어떤 것이므로 우리 몸의 세포 속에는 우리의 기억이 주입되어 있으며, 그래서 다른 사람의 세포를 받는다는 것은 동시에 그 사람의 기억도 받는 것이 된다.

당신의 몸 세포는 끊임없이 경험을 처리하고 그것을 당신의 개인적 관점에 의거하여 대사작용으로 변환시킨다. 당신은 단순히 원시 데이터를 눈과 귀를 통해 통과시키고 거기에 판단의 낙인을 찍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그것을 내화하면서 실제로 자신이 그 해석 자체로 ‘변하는’ 것이다. 일자리를 잃어서 실의에 빠진 사람은 자신의 몸 구석구석으로 그 슬픔을 투사한다. 즉, 대뇌에서 나오는 신경전달물질이 고갈되고 호르몬의 양이 떨어지며, 수면 주기가 혼란해지고, 피부세포의 표피층에 있는 뉴로펩티드 수용체가 교란되고, 혈액 속의 혈소판이 끈적끈적해져서 덩어리가 되기가 더 쉬워지며, 눈물조차 기뻐할 때의 눈물과는 다른 화학성분을 보이는 것이다.

그 사람이 새로운 직장을 얻게 되면 이 모든 생화학적 양상이 극적으로 바뀌며, 만일 그 직장이 매우 만족스럽다면 그의 몸에서 분비되는 신경전달물질, 호르몬, 수용체, 그리고 DNA 자체에 이르기까지 다른 모든 필수 생화학물질들은 갑작스럽게 상황이 호전되었음을 반영하기 시작할 것이다. 우리는 DNA를 유전정보가 저장된 잠겨진 창고로 생각하지만, 작용상 쌍둥이인 RNA는 매일매일의 상황에 반응하고 있다.

의과대학생들은 시험기간이 되면 암에 대항하는 면역반응에 필수적인 화학물질인 인터루킨(interlukin) 2의 수치가 줄어드는 현상을 보인다. 인터루킨2의 생산은 전령 RNA(messenger RNA)에 의해 제어되는데, 이것은 시험결과에 대한 학생들의 걱정이 유전자에 곧바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 점은 우리가 실제로 원하는 상태의 신체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우리의 의식을 사용해야 할 필요성이 크다는 것을 역설해 주고 있다. 의과대학생들의 시험에 대한 걱정은 실업자의 걱정처럼 언젠가는 지나간다. 그러나 노화현상만은 날마다 대면해야만 한다. 늙어간다는 것에 대한 당신의 해석이 향후 40, 50년, 혹은 60년 동안에 일어날 일들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신경학적으로 말하자면, 뇌의 신호는 한갓 물결치는 에너지의 결합이다. 당신이 혼수상태에 있다면 이 신호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당신이 깨어서 정신을 차리고 있다면 그 신호는 무한히 창조적으로 해석할 수 있도록 개방되어 있다. 셰익스피어의 극 중에서 ‘우리는 꿈과 똑같은 재질로 만들어져 있다’고 말하는 프로스페로의 대사는 은유적인 표현이 아니다. 인체란 대뇌신호가 3차원적으로 투사되어 우리가 ‘현실적’이라고 말하는 상태로 변형된 것, 즉 현실화된 꿈과도 같다.

노화란 일련의 오도된 변형, 즉 균형잡히고 안정적인 자기쇄신의 과정이 옆길로 샌 것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니다. 이것이 육체상의 변화로 나타나는 것이지만 실제로 일어난 일은 먼저 우리의 의식 - 우리 마음 속의 의식이든 세포 속의 의식이든 상관없다 - 이 옆길로 샌 것이다.

우리는 자기가 어떻게 이처럼 옆길로 새게 되었는지를 깨달음으로써 체내의 생화학기능을 제자리로 돌려놓을 수 있다. 의식을 벗어나면 생화학작용은 없다. 우리 몸 안의 모든 세포들은 우리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는지를 속속들이 알고 있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자신은 무차별로 냉혹하게 몸을 허물어뜨리는 세월의 제물이라고 생각하던 환상은 깨끗이 떨어져 나간다.


6. 지능의 자극이 신체를 시시각각 끊임없이 새로운 형태로 만들어 낸다.

몸을 새로운 형태로 만들어 내는 것은 변화하는 생명의 요구를 맞추기 위해서 필요하다. 예컨대 어린아이의 눈에 보이는 현실 속에는 친숙하지 못한 많은 것들이 있다. 그리하여 세상에 대해서 좀더 많은 것을 배우기까지는 그의 몸은 능숙하고 조절되지 못한 행동을 보인다. 3개월 된 아이는 그림 속의 계단과 실제의 계단을 구별하지 못한다.

그 아이의 대뇌는 어떤 것이 눈의 착각인지를 아직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6개월이 되면 아이의 현실이 변화된다. 그 정도 된 아이들은 눈의 착각을 알아챈다. 그리고 그 지식을 이용해서 그들의 몸은 3차원 공간을 좀더 잘 분별할 수 있게 된다. (거울이 벽 속의 구멍처럼 보이지 않으며, 진짜 계단은 올라가기 위한 것이지만 그림 속의 계단은 그렇지 않으며, 둥근 것과 판판한 것은 다르다는 등.) 이러한 인식의 변천은 단지 정식적인 것만이 아니다. 눈과 손을 사용하는 전혀 새로운 방법이 성공적으로 사용되며, 형상을 인식하고 운동기관을 조절하는 뇌의 다양한 중추의 육체적인 수준에도 변화가 온다.

새로운 인식이 계속 뇌로 들어오는 한 우리의 몸은 새로운 방식으로 반응할 수 있다. 이보다 더 강력한 젊음의 비결은 없다. 여든 살 먹은 나의 환자 한 분이 간명하게 말씀하신 것처럼, ‘사람은 성장하기 때문에 늙지 않는다. 성장하기를 멈추면 늙는 것이다.’ 새로운 지식, 새로운 기술, 세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방식, 이런 것들이 몸과 마음을 성장시키며 이 일이 계속 일어나는 한 시시각각 새로워지려고 하는 본연의 경향이 외부로 표현된다.

양자의 세계에서, 변화는 불가피하지만 노화는 그렇지 않다. 우리 육신의 시간적 나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청년 같은 50대가 지니고 있는 분자와 할아버지 같은 50대의 체내 분자는 나이가 같다. 어느 쪽이나 몸의 나이를 말하자면 50억 살(온갖 종류의 원자의 나이)이라고도 할 수 있고, 한 살(인체 조직 속의 원자가 교환되는 데 걸리는 시간)이라고 할 수도 있으며, 혹은 3초(세포가 음식과 공기와 물을 처리하는 효소를 교체하는 데 걸리는 시간)라고 할 수도 있다.

사실, 우리는 우리를 소용돌이처럼 휩쓸고 지나가는 정보의 나이만큼밖에 나이가 들지 않았다. 그리고 이 점은 매우 운 좋은 일이다. 우리는 양자장에 담겨 있는 정보의 내용을 통제할 수 있다. 각 세포를 이루고 있는 음식과 물과 공기 속의 원자에 담겨 있는 정보는 일정량의 고정된 것이지만 그 정보를 변형시킬 수 있는 힘은 자유의지로 조절할 수 있다.

한 가지, 이 세계에서 당신이 자유롭고 확실하게 가질 수 있는 것은 세계에 대한 당신의 해석이다. 예를 들자면,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어린아이들이 성장을 멈춘 의학적 사례가 놀랄 정도로 많이 있다. ‘사회심리적 소인증(小人症)’이라고 불리는 이 증후군은 심하게 학대받은 아이들 가운데서 발생하는데, 그들은 사랑의 결핍을 성장호르몬의 결핍으로 바꿔 놓는다. 이 증상은 성장호르몬은 모든 아이들의 DNA 속에 새겨진 기정(旣定) 시간표에 따라 분비되는 것이라는 가설을 무색하게 만든다. 이런 경우에 해석의 힘은 신체 정보의 장에 변화를 일으킴으로써 유전자에 새겨진 내용을 무효화시킨다.

해석은 자신과의 상호작용에서 일어난다. 당신은 이것을 마음 속의 대화로 경험한다. 생각, 판단, 그리고 느낌이 끊임없이 마음 속을 소용돌이친다. “난 이것이 좋아. 저것은 싫어. 이것은 겁나지만 저것은 잘 모르겠어.” 등등. 마음 속의 대화는 제멋대로 일어나는 정신적 잡음이 아니다. 그것은 당신이 지닌 가정과 신념에 의해서 의식의 심층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당신이 현실에 대해 세워 놓은 어떤 가정이 진실이라고 생각함으로써 신념의 핵심이 형성된다. 그리고 당신이 그것을 견지하고 있는 한, 당신의 신념은 신체 정보의 장을 특정한 변수의 범위 안에 가둬 놓는다. 즉, 당신은 어떤 것을 자신이 기대하는 수준에 맞는가 안 맞는가에 따라서 좋은 것으로, 혹은 싫은 것으로, 괴로운 것으로, 혹은 즐거운 것으로 인식한다.

어떤 사람이 인식을 변화시키면 그의 현실에도 또한 변화가 일어난다. 사회심리적 소인증을 앓는 아이들의 경우, 성장호르몬을 투여하는 것보다 사랑이 있는 환경 속에 살게 하는 것이 더 큰 효과를 나타낸다. (자신은 부모가 원치 않으며 가치없는 존재라는 신념이 너무 강하면 성장호르몬을 투여해도 몸이 자라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이 많은 양부모를 만나 자신이 사랑스럽지 않은 존재라고 믿는 이들의 근본 신념이 바뀌며 그들은 자연의 성장호르몬을 마치 둑이 터지듯이 분비하는 반응을 보일 수도 있다.

그리하여, 경우에 따라서는 정상적인 키와 몸무게와 발육상태로 돌아오기도 한다. 그들이 자신을 달리 보게 됨으로써 생리적 차원에서 그들의 개별적 현실이 바뀌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지니고 있는 노화에 대한 두려움과 인간은 늙게 되어 있다는 뿌리깊은 신념이 어떻게 노화 그 자체로 변형되어 가는지를 보여 주는 강력한 일화이다. 이러한 두려움과 신념이 늙어가는 자화상을 만들고, 그것들이 자기충족적 예언(self-fulfilling prophecy) - 마음 속으로 바랐던 것이 실제 결과로 나타나는 것 - 으로서 작용하는 것이다.

이 감옥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는, 두려움이 떠받치고 있는 신념을 뒤엎어야만 한다. 당신의 몸이 시간과 함께 쇠퇴해 간다는 신념 대신에 당신의 몸은 시시각각 새로워진다는 신념을 키워 가라. 당신의 몸이 마음 없는 기계라는 신념 대신에, 당신의 몸은 생명의 심원한 지능으로 차 있으며 그 지능의 유일한 목적은 당신을 북돋우는 것뿐이라는 믿음을 키우라. 이 새로운 신념들은 그저 지니기에 기분좋은 것만이 아니라 하나의 사실이다. 우리는 몸을 통해서 삶의 희열을 경험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이 우리와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원하는 것을 원한다고 믿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7. 분리된 개체처럼 보이는 겉모습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두가 우주를 지배하는 지능의 패턴과 연결되어 있다.

우리와 주위의 환경은 하나이다. 자신을 바라볼 때 우리는 자신의 몸이 어느 지점에서 끝나 있다고 인식한다. 우리의 몸은 방의 벽이나 집 밖의 나무와는 텅 빈 공간을 사이에 두고 서로 떨어져 있다. 그러나 양자의 관점에서 보면 ‘고형 물질’과 ‘빈 공간’의 구별은 의미가 없다. 1입방센티미터마다 양자 공간은 거의 무한대의 에너지로 채워져 있다.

또한 아무리 미세한 진동이라도 그것은 전체 은하계 속을 진동하고 있는 광대한 장의 일부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의 환경은 곧 우리 몸의 연장이다. 호흡을 할 때마다 우리는 중국에 사는 누군가가 어제 내쉰 수억 개의 공기 원자를 들이마신다.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산소와 물과 햇빛은 우리 체내에 있는 것과 거의 다를 것이 없다.

원하기만 한다면, 당신은 자신이 접촉하는 모든 사물과 합일되어 있는 상태를 체험할 수 있다. 보통의 깨어 있는 의식 상태에서는 당신은 장미를 만져 보고 딱딱하다고 느낀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의 에너지와 정보의 덩어리인 당신의 손가락이 또다른 에너지와 정보의 덩어리인 장미를 만지고 있는 것이다. 당신의 손가락과 그것이 만지는 대상은 둘 다 우리가 우주라고 부르는 무한한 장의 한갓 미세한 끄트머리일 뿐이다. 이러한 진리가 고대 인도의 성현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이렇게 외치게 하였다.

소우주가 그러한 것처럼 대우주 또한 그러하도다.
원자가 그러한 것처럼 우주 또한 그러하도다.
인간의 몸이 그러한 것처럼 우주의 몸 또한 그러하도다.
인간의 마음이 그러한 것처럼 우주의 마음 또한 그러하도다.

이것은 한낱 신비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분리의 상태에서 의식을 해방시켜 만물과의 일체성(unity)을 확인한 이들의 실제적인 체험이다. 일체성 속에서는 ‘외부에’ 있는 의식, 사람들, 사물들, 그리고 사건들은 모두 우리 몸의 일부가 된다. 사실, 우리는 이 영향력들의 중심에 있는, 관계들의 거울일 뿐이다. 유명한 자연주의자인 존 뮤어(John Muir)는 “무엇인가를 따로 집어 내려고 할 때마다 우리는 그것이 우주 속의 모든 것들과 얽혀 있음을 발견한다”고 외쳤다. 이것은 결코 희귀한 경험이 아니며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사물들의 주춧돌이다.

일체성의 경험을 할 수 있는가는 노화와 관련해서 중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와 우리의 연장된 몸 사이에 조화로운 상호작용이 있으면 우리는 기쁘고 건강하고 젊은 느낌을 느끼기 때문이다. “공포는 분리에서 나온다”고 인도의 성현들은 말한다.

이 말 속에서 그들은 우리가 왜 노화하는가를 깊숙이 지적해 주고 있다. 자신을 분리된 존재로 봄으로써 우리는 자신과 ‘외부의’ 사물들 사이에 혼돈과 무질서를 만들어 낸다. 최종 상태의 분리인 죽음은 공포스러운 미지로서 우리 앞에 나타난다. 생명의 일부인 변화의 가능성 그 자체가 이루 말할 수 없는 공포를 자아낸다. 왜냐하면 그것은 곧 상실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려움이 일어나면 그것은 불가피하게 폭력을 수반한다. 다른 사람들, 사물들, 사건들이 우리와는 떨어져 있으므로 우리는 그것이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되게 만들고자 한다. 조화 속에는 폭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일체성 속에 있는 사람은 지배가 불가능한 것을 지배하려고 무모하게 애쓰는 대신 받아들이는 것을 배운다.

그렇게 해야만 하기 때문이 아니라 실제로 그의 내면과 그의 연장된 몸 속에는 평화와 질서가 있기 때문이다. 현대의 성현인 크리슈나무르티(Jidu Krishnamurti)는 경이롭게 각성된 의식과 지혜와 줄어들 줄 모르는 활력으로 90여 성상을 살았다. 나는 그가 여든 다섯의 나이로 강단을 향해 계단을 뛰어 올라가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그를 여러 해 동안 알고 지낸 한 여인이 하는 말에 나는 매우 감명 받았다. “나는 그에 대해서 이 한 가지만을 알았습니다. 그에게는 폭력성이 전혀 없습니다.”

양자적 우주관은 그 방정식과 가정에 관한 한 영적인 관점이 아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과 그의 동료들은 자신들의 발견에 대해 신비로운 경외감으로 일치되어 있었다. 닐스 보어는 물질의 파동적인 속성을 우주심에 비교했다. 그리고 어빈 슈뢰딩거는 우주는 그 자체가 살아 있는 마음이라는 믿음을 간직한 채 생을 마쳤다.

(이것은 중력과 다른 모든 힘들이 신의 마음 속에 있는 생각이라고 한 뉴턴의 말을 재확인시킨다.) 진리인 것은, 인간 자신의 영혼을 탐사하는 것이 언제나 인간을 더 큰 의미의 영혼의 가장자리로 데려다 놓는다는 점이다. 새로운 패러다임은 이러한 만남을 객관적인 관점에서 서술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한때 마음과 몸과 영혼을 갈라 놓았던 경계를 실제로 넘나들 수 있게 해준다.

분리로부터 일체로, 분쟁으로부터 평화로의 변화가 모든 영적 전통의 목표이다.

“우리는 똑같은 객관적 세계 속에 살고 있지 않습니까?” 하고 한 제자가 스승에게 물었다.

스승이 대답했다.

“그렇다. 그러나 그대는 세계 속에 있는 자신을 보고 나는 내 속에 있는 세계를 본다.

이 하찮은 인식의 전환이 속박과 해방의 그 모든 차이를 만든다.”

우리는 모두가 자신을 분리되고 외떨어진 존재로 봄으로써 만들어낸 무질서 속에 구속되어 있다. 그 완벽한 예가 감정이 격하고 욕구불만적인 행동은 보이며 끊임없이 마감시한에 쫓기는 느낌을 가지고 있는 A형의 성격(Type A Personality) - 성급하고 경쟁심이 많으며 항상 긴장하고 있는 인간의 행동유형. 미국의 심장의학자 메이어 프리드먼(Meyer Friedman)과 로이 로젠먼(Roy H. Rosenman)이 만든 말이다. - 이다.

이런 사람들은 그 어떤 종류의 포용성이나 흐름 속에도 자신을 풀어놓지 못함으로써 자신의 과거의 상처를 분노로 키워 간다. 이같이 억눌린 혼란은 적개심과 성급함, 타인에 대한 책망, 까닭 없는 공포로 주변 환경에 투사된다. 이런 사람은 끊임없이 남을 지배하려고 하며 사소한 스트레스에 대해서도 과민하게 반응하여 자신과 남에 대해 가혹한 비판을 가한다.

특히 사업계에서 A형의 사람은 끊임없이 혼돈을 일으키는 와중에서 자신은 성공적으로 경쟁해 나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기기만에 빠진다. 실제에 있어서는 일의 성과는 매우 낮으며 욕구불만이 쌓여 감에 따라 자신의 연장된 몸으로부터 들어오는 피드백은 육체적 몸 속에 더 많은 폐허상태를 만들어 낸다. 혈압과 콜레스테롤치가 상승하고 심장은 불필요한 스트레스성 발작을 잘 일으켜 치명적인 심장마비나 뇌졸중의 위험이 심각하게 높아진다.

A형의 성격은 자신의 연장된 몸과 조화롭게 교류하지 않음으로써 만들어지는 해로움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앞으로 알게 되겠지만 환경 속에서 인식하는 스트레스는 모든 사람들을 덮쳐 오는 대부분의 노화현상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우리를 노화하게 만드는 것은 스트레스라기 보다는 스트레스를 인식하는 것이다. ‘저 밖에’ 있는 세계를 위협으로 보지 않는 사람은 스트레스 반응이 가져오는 손상에서 해방되어 환경과 공존할 수 있다. 여러 모로 보아, 늙지 않는 세계를 경험하기 위해서 당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은 세계가 바로 당신 자신임을 확인시켜 주는 지식을 더욱 풍부하게 가지는 것이다.


8. 시간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만물의 배후에 숨어 있는 실재는 영원하다.

이른바 시간이라는 것은 사실은 계량화된 영원이다.

우리의 몸과 온 물질세계가 끊임없는 변화의 전개이기는 하나, 그것은 과정이라기보다는 실재이다. 우주는 생겨났으며 진화하고 있다. 우주가 생겨남으로써 시간과 공간이 존재하게 되었다. 대폭발의 순간 이전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은 시간과 공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논리적인 마음으로는 ‘시간 이전에는 무엇이 있었나?’ 또는 ‘공간보다 큰 것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떠올리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아인슈타인조차도 양자이론을 처음 구상하던 젊은 시절에는 뉴턴의 사상에 빠져 우주가 변하지 않는 상태로 존재한다는 낡은 관념을 고수하여, 시간과 공간은 생겨나지도 없어지지도 않는 영원한 상수라고 생각했다.

이 정상(定常)상태(steady-state)의 실재관은 우리의 오감이 아직도 우리에게 보고하고 있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이 증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시간이 빨라지거나 늦어지는 것을 느낄 수가 없다. 우리는 공간이 확장되거나 수축되는 것을 감지할 수가 없으나, 이 또한 리드미컬한 우주의 일부분이다.

더 나아가, 시간과 공간이 생겨났던 무차원의 영역을 상상한다는 것은 인식의 급격한 전이를 요구한다. 우주는 모종의 영원한 근원이 있어야만 했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 자신에게 있어서도 이것은 진리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인식의 전이를 강요당하고 있다.

우리의 몸이 변화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이 시간 속에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한다. 변화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어떤 흐름, 혹은 연속(순차적 연쇄)이 있어야 한다. 이 연속 속에는 전과 후가 있다. 이번의 호흡 전에는 먼젓번의 호흡이 있었고 이번의 심장박동 후에는 다음번의 심장박동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론적으로, 시간과 도구만 있다면 우리는 어떤 사람의 평생 동안의 심장박동에 대한 심전도(心電圖)를 만들 수 있을 것이고, 출력된 그것을 손에 듦으로써 우리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한자리에 담긴 것을 가지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아래로 훑어볼 수도 있고 위로 거슬러 훑어볼 수도 있다. 마지막의 박동과 맨 처음의 박동이 나란히 오도록 접어 볼 수도 있다.

자연계 속의 가장 기본적인 시공간적 사건들에 관해서 양자물리학이 밝혀 놓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식의 조작이다. 이 사건들이 에너지 상태를 교환할 때 두 개의 입자는 쉽게 시간을 거슬러갈 수도 있고 앞질러갈 수도 있다. 과거에 일어난 일이 미래의 에너지 사건에 의해 변경될 수도 있다. 화살처럼 돌이킬 수 없이 앞으로만 날아가는 시간의 개념은 양자 공간의 복잡한 기하학 속에서 영원히 깨져 버렸다. 양자공간 속에서는 다차원의 줄과 고리가 시간을 모든 방향으로 끌고 다니며, 심지어는 그것을 정지시키기도 한다.

우리에게 남겨진 유일한 절대는 무시간성이다. 왜냐하면 이제 우리는 우리의 온 우주가 그보다 큰 실재에서 터져 나오는 일개사건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날과 달과 시, 분, 초라고 인식하는 그것은 더 큰 실재에서 떼어 낸 조각들이다. 무시간성을 마음 내키는 대로 떼어 내는 것은 인식자인 우리에게 달린 일이다.

우리의 인식이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을 만들어 낸다. 끊임없이 손에서 빠져나가는 귀한 생필품으로서 시간을 경험하는 사람은 세상의 모든 시간을 다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과는 완전히 다른 개인적 현실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하루를 늘 시간에 쫓기며 살고 있는가? 당신은 빠르고 불규칙적인 심장박동과 소화 리듬의 교란, 불면증, 고혈압으로 신체상에 나타나는 숨막히고 공포스러운 ‘시간병’ 증세에 시달리는가? 이러한 개인 간의 차이는 우리가 변화를 어떻게 인식하는가를 나타내는 것이다. 변화의 인식은 시간의 경험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과거나 미래에 의식을 두고 있으면, 우리는 시간의 장 속에서 노화를 만들어 내는 셈이다. 나이에 비해서 놀라울 정도로 젊어 보이는 한 인도의 스승은 이것을 이렇게 설명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과거나 미래 속에서 일생을 보낸다. 그러나 나의 삶은 현재 속에 고도로 집중되어 있다.” 인생이 현재 속에 집중되어 있으면 그것이 가장 현실적이다.

왜냐하면 과거나 미래가 그 위에 침범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순간에 과거나 미래는 어디 있는가? 아무 데도 없다. 오직 현재의 순간만이 존재한다. 과거와 미래는 정신적인 투사(投射)이다. 당신이 이 투사에서 자신을 해방시킬 수 있다면, 과거를 건져 내려고도, 미래를 어떻게 해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면 전혀 새로운 체험의 공간이 열린다. 그것은 늙지 않는 몸과 시간을 초월한 마음의 체험이다.

시간에 얽매이지 않는 현실과 일체가 될 수 있는 능력은 지극히 중요하다. 그렇게 되지 못하면 시간이 불가피하게 가져오는 노쇠로부터 벗어날 길이 없다. 당신은 간단한 심신 훈련으로써 시간을 초월한 상태를 잠시나마 맛볼 수 있다.

하루 중에서 압박감 없이 이완된 느낌을 가질 수 있는 시간을 정하라. 편안한 의자에 앉아 시계를 풀어라. 시계를 들거나 고개를 돌리지 않고도 시간을 확인할 수 있도록 가까운 장소에 시계를 놓아 두라. 이제 눈을 감고 호흡을 의식하라. 의식으로 하여금 들고 나는 숨의 흐름을 편안히 따르도록 놓아두라. 호흡의 흐름과 함께 온몸이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한다고 상상하라. 1, 2분 후에는 따뜻하고 이완되는 느낌이 근육 전체에 퍼지는 것을 의식하게 될 것이다.

내면적으로 안정되고 고요해지면 천천히 눈을 살짝 떠서 시계의 초침을 엿보라. 초침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 당신이 얼마나 이완되느냐에 따라 초침은 다른 행태를 보일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초침이 완전히 멎어 있을 것이고 이런 효과는 1초 내지 3초까지 지속될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초침이 0.5초 정도 머뭇거리다가 정상적인 째깍거림으로 건너뛸 것이다.

또다른 사람들에게는 초침이 움직이기는 하지만 평상시보다 느려져 있을 것이다. 이 간단한 실험은 직접 해 보기 전에는 전혀 불가능한 일처럼 보인다. 하지만 일단 시계가 멈추어 있는 것을 눈으로 확인한다면 시간이 인식의 산물임에 대해서는 결코 의심을 가지지 않게 될 것이다. 존재하는 유일한 시간은 당신이 인식하고 있는 시간뿐이다.

당신은 자신의 의지대로 의식을 시간을 초월한 영역으로 데려가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 명상은 이러한 경험을 익히기 위한 고전적인 기법이다. 명상중에는 활동하는 마음이 그 근원으로 철수된다. 이 변화하는 우주가 변화를 초월한 근원을 가져야만 하듯이, 쉬지 않고 활동하는 당신의 마음 또한 생각과 느낌과 감정과 욕망과 기억을 넘어선 의식 상태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다. 이것은 심오한 개인적 체험이다.

시간이 없는, 혹은 초월적인 의식의 경지에서 당신은 충만한 느낌을 가지게 된다. 변화와 상실과 쇠퇴 대신 안정감과 충만감이 있다. 당신은 무한(無限)이 사방을 가득 채우고 있음을 느낀다. 이러한 경험이 현실이 되면 변화와 결부된 공포는 사라지고 시, 분, 초와 날과 달로 쪼개어진 영원은 부차적인 것이 되고 매순간의 완전성이 본질적인 것이 된다.

이제 명상은 서양 문화의 주류 속으로 진입했다. 연구자들은 침묵과 충만과 영원이라는 주관적 경험을 측정해 내기 위해 과학적 기법들을 동원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명상자의 생리기능이 훨씬 더 효율적으로 발휘되는 상태로 전이하는 것을 분명히 목격했다.

수많은 개인적 연구결과에 의하면, 호흡이 길어지고 산소 소비량이 줄어들며 대사율이 떨어진다는 것이 밝혀졌다. 노화와 관계되는 가장 중요한 결론은, 스트레스 - 노화현상을 촉진시키는 것으로 알려진 - 와 관련된 호르몬의 불균형이 회복된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이것은, 노화와 연관되는 다양한 생리상태의 변화에 의해 알 수 있는 것처럼, 노화과정을 늦추거나 심지어는 역전시키기까지 한다. 초월명상(TM, Transcendental Meditation) - 인도의 스승 마하리쉬 마헤쉬 요기가 미국에 전파한, 만트라를 통해 의식을 일종의 초월상태로 이끄는 명상기법 - 을 수행하는 사람들을 연구한 나의 경험에 의하면 오랫동안 명상을 한 사람은 생리적인 연령이 실제 나이보다 5년 내지 12년 정도 젊은 것이 확인되었다.

20년이 넘도록 계속된 이 연구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노화의 생리적 과정 그 자체를 조작할 필요는 없으며 단지 의식을 통해서만도 바라는 결과가 성취될 수 있다는 점이다. 달리 말해서 명상은 사람으로 하여금 시간을 경험하게 하는 기준이 되는 틀 그 자체를 바꾸어 놓는 것이다. 양자 차원에서는, 시간이 그다지 큰 지배력을 지니지 못하는 현실 속으로 마음을 옮겨다 놓는 것만으로도 심장박동이나 호르몬치와 같은 시공간 속의 물리적 사건에 영향을 준다. 새로운 패러다임은, 시간이 다양한 차원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의 의식은 그 모든 차원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9. 우리는 모든 변화를 초월한 변하지 않는 현실 속에 살고 있다.

이 현실을 경험하면 변화는 우리의 지배 아래에 들어온다.

지금 당신이 주장할 수 있는 유일한 생리학은 시간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의식에 종속된 것이라는 사실은 당신이 전혀 다른 형태의 기능 - 불사의 생리학 - 을 보유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그것은 곧 불변성의 경험을 의미할 것이다. 불변성은 변화의 결과로서는 생길 수가 없다. 그것은 시간에 속박된 의식으로부터 시간을 초월한 의식으로의 전환을 요구한다. 이러한 전환에는 여러 가지 단계가 있다. 예컨대 당신이 극도로 시간에 쫓기면서 일하고 있다고 하자. 그런 압박감에 대한 신체의 반응이 언제나 일률적인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압박감을 창조성과 에너지의 원천으로 이용하여 성공하고, 어떤 사람은 그에 떠밀려서 적극적인 동기를 상실하고 중압감을 느껴 스트레스를 보상할 만한 만족을 얻어내지 못한다.

창조적으로 반응하는 사람은 시간의 압박에 휘말리지 않는 법을 알고 있다. 그로부터 스트레스와 구속감을 느끼는 사람들과는 달리 그는 최소한 부분적으로나마 그것을 초월하는 것이다. 스트레스를 느끼는 사람에게는 시간이 너무나 압도적으로 자신을 덮쳐 온다. 그는 내부의 시계가 째깍거리는 소리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리고 그의 몸은 그러한 마음의 상태를 반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의 몸 세포는 끊임없이, 온갖 미묘한 방법으로, 시간에 대한 우리의 인식에 자신을 맞추어 나간다. 생리학자라면, 우리가 수백만의 얽히고 설킨 심신상관적 사건들로 이루어진 일련의 과정의 연쇄 속에 끌려 다닌다고 혹은 갇혀 있다고 말할 것이다.

시간에 얽매인 과정들을 재정돈할 수 있는 어떤 상태에 도달할 수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매우 중차대한 문제이다. 간단한 비유가 이 점을 밝혀 줄 수 있다. 당신의 신체를 뇌와 모든 세포 사이를 왕복하는 신호들의 출력물로 생각하라. 보내지는 신호의 종류를 정하는 신경계는 신체의 소프트웨어 역할을 한다. 온갖 종류의 호르몬과 신경전달물질과 기타 전령 분자(messenger molecule)들을 이 소프트웨어가 처리하는 입력물이다.

이 모든 것이 당신의 몸을 구성하는 눈에 보이는 프로그램이다. 그런데 프로그래머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어디엔가 있는 것일 틀림없다. 심신상관 체계 속에서는 매초마다 수천 개의 결정이 내려지고 생명의 요구에 부응하게 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선택이 내려진다.

만일 내가 인도에서 길을 걷다가 코브라를 보고 겁에 질려서 뒤로 물러섰다면, 이 사건을 제어하는 눈에 보이는 장치는 내가 보인 근육의 반응일 것이다. 그것은 나의 신경계가 보낸 화학적 신호에 의해 일어난 것이다. 빨라진 심장박동수와 가빠진 호흡은 뇌하수체에서 보내진 특별한 화학물질(부신피질 자극 호르몬)에 반응하여 부신피질에서 분비된 아드레날린이 촉발시킨 것이다.

나의 겁에 질린 반응과 관련된 분자 차원의 작용을 생화학자가 낱낱이 추적할 수 있다고해도, 그는 여전히 그렇게 반응하기로 결정을 내린 눈에 보이지 않는 결정자를 발견해 내지는 못할 것이다. 아무리 짧은 순간적 반응을 한다고 할지라도 마음도 없이 몸이 혼자 놀라 물러서지는 않기 때문이다. 전혀 다른 프로그램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라면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일 것이다. 땅꾼이라면 흥미롭다는 듯 허리를 구부릴 것이고 힌두교 신자라면 시바 신의 형상을 발견하고 경외감에 무릎을 꿇을 것이다.

사실은 ‘그 어떤’ 가능한 반응 - 공포, 흥분, 신경질적 반응, 마비, 무감각, 호기심, 기쁨 등등 - 도 다 일어날 수가 있다. 보이지 않는 프로그래머는 눈에 보이는 신체기관을 프로그램할(어떤 유형의 행동을 하라고 지시할) 수 있는 무한한 방법을 가지고 있다. 내가 뱀과 마주치는 순간, 나의 모든 기초 생리기능들 - 호흡, 소화, 대사, 배설, 인식, 사고작용 - 은 코브라가 나에게 지고 있는 ‘의미’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올더스 힉슬리(Aldous Huxley)의 다음 말 속에는 진리가 담겨 있다. “경험이란 당신에게 일어나는 어떤 것이 아니라 당신에게 일어나는 것에 대한 당신의 반응이다.”

당신은 이 의미란 것을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는가? 빠르고 손쉬운 대답은 대뇌 속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신체 기관은 다른 모든 기관들과 마찬가지로 끊임없는 변화 속에 있다. 순간마다 뇌 속의 수 십억의 원자들은 철새처럼 들락거린다. 대뇌는 일평생 단 한번도 동일한 패턴을 보이는 법이 없는 전기파로 회오리친다.

뇌의 기본적인 화학작용은 점심식사에 색다른 음식이 들어왔거나 갑작스럽게 기분이 흔들리면 변이될 수 있다. 그러나 뱀에 대한 나의 기억은 변화라는 큰 바다 속에 녹아 없어지지 않는다. 나의 기억은, 그 기억 위에 서서 말없이 나의 삶을 지켜보며 나의 경험을 참고하여 언제든지 새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즐기는 프로그래머가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는 상태로 존재한다. 이 점에 있어서는 프로그래머는 단지 선택하는 의식일 뿐이다. 그것은 변화에 압도되지 않고 다만 음미한다. 그러므로 시간에 얽매이는, 일상적 인과의 세계에서 생기는 한계에 제약받지 않는다.

뱀을 무서워하는 ‘나’는 과거 언젠가 그 두려움을 학습했다. 나의 모든 반응은 시간에 얽매인 자아와 그것이 지닌 성향의 요체이다. 1,000분의 1초도 안 되는 시간 속에서 프로그램되어 있던 공포가 일련의 신체적 신호의 연쇄를 일으켜서 그와 같은 반응을 만들어 낸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다른 ‘나’는 드러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과거에 의해 한정되지 않은 의식을 가지고 말없이 지켜보는 결정자(decision maker)에 의해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는 방법을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미묘한 경로로, 우리 내부에 있는 어떤 것이 우리가 갓난아이적 이래로, 설사 변한 것이 있다고 해도 크게 변한 것이 없음을 다들 느끼고 있다.

아침에 깨어나면 오랜 세월동안 형성되어 온 온갖 규정들이 자동적으로 자리를 잡기 전의 순수의식이 드러나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에 우리는 그저 우리 자신이다. 우리는 행복하지도 않고 슬프지도 않으며, 잘난 체하지도 않고 겸손해 하지도 않으며, 늙은 것도 아니고 젊은 것도 아니다.

아침에 깨어날 때 이 ‘나’는 경험이라는 갑옷을 재빨리 걸쳐 입는다. 수초 내로 나는 자신을 상기한다. 예컨대 나는 마흔여섯 살의 의사이며 아내가 있고 두 자녀가 있고 보스턴 근교에 집이 있고 병원까지는 10분 거리에 있다는 등으로, 이러한 자아의 정체성은 변화의 결과이다. 변화를 초월한 ‘나’는 어디서나 일깨워질 수 있다. 할머니의 요리냄새를 맡고 있는 인도 델리 시의 다섯 살배기 아이, 플로리다에서 야자수 나뭇잎을 흔드는 사람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여든 살 노인네 등으로.
고대 인도의 성현들이 간단히 ‘진아(眞我)’라고 부른 이 변함없는 ‘나’는 경험에 있어서 나의 진정한 기준점이 되어 준다. 다른 모든 기준점은 변화와 쇠퇴와 상실을 피할 수 없다. 다른 모든 ‘나’의 느낌은 상대적 세계가 부과하는 모든 시간에 얽매인 조건, 예컨대 고통 아니면 기쁨, 빈곤 아니면 부요, 행복 아니면 슬픔, 젊음 아니면 늙음과 동일화되어 있다. 일체의식 속에서는 이 세계는 영혼(Spirit) - 곧 의식 - 의 흐름으로 설명된다. 우리의 지상의 목적은 영혼으로서의 진아와 긴밀한 관계를 확립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처럼 긴밀한 관계를 만들어 내는 정도에 따라서 늙지 않는 몸과 시간을 초월한 마음의 경험이 실현될 것이다.


10. 우리는 노화와 질병과 사망의 제물이 아니다.

이들은 풍경의 일부일 뿐 어떤 형태의 변화에도 물들지 않는 지켜보는 자는 아니다.

근원적으로 생명은 창조이다. 당신이 자신의 내면의 지능과 접하게 되면 당신은 생명의 창조적인 핵심에 이른 것이다. 낡은 패러다임에서는 생명의 지배력이 DNA에 주어져 있었다. DNA는 극도로 복잡한 구조의 분자로서, 유전학자들에게조차 그 비밀은 1퍼센트도 밝혀져 있지 않다. 새로운 패러다임에서는 생명의 지배력이 의식에 속해 있다. 앞에서 열거된 모든 예들 - 성장호르몬의 분비를 차단할 수 있는 아이, 초조감을 느낄 때 인터루킨 생산에 변동이 오는 의대생들, 의지로써 심장박동수를 조절할 수 있는 요기들 - 은 대부분의 기초 신체기능들이 우리의 정신상태에 반응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우리의 몸 세포 속에서 일어나는 수십억 가지의 변화는 단지 스쳐 지나가는 생명의 광경일 뿐이다. 이 막 뒤에는 지켜보는 자가 있다. 그는 곧 흐르는 의식의 근원이다. 내가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의식과 함께 시작되고 끝난다. 내가 스스로 정하는 모든 목표와 기대치는 의식 속에서 형성된 것이다. 고대의 성현들이 진아라고 한 그것은 현대 심리학 용어로 의식의 연속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리고 일체의식이라고 알려진 의식상태는 의식이 완전한 상태이다. 즉, 가면과 환상과 벌어진 틈바구니와 파편이 없는 자신의 연속체 전체를 간파하는 상태이다.

우리는 의식의 연속성을 유지하지 못하므로 모두가 이런 저런 종류의 틈바구니 속으로 떨어진다. 많은 물질적 존재의 영역들이 우리의 지배를 벗어나 질병과 노화와 사망으로 우리를 이끈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의식이 파편화되었을 때에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1970년대 초반에 메닝거 병원에서 행한 유명한 일련의 실험에서 인도의 저명한 영성가인 스와미 라마는 의지로써 자신의 심장박동수를 70회에서 정상치를 크게 상회하는 300회까지 올릴 수 있는 능력을 시범해 보였다. 정확히 말하면 그의 심장박동은 더 이상 정상적으로 리드미컬하게 혈액을 펌프질하지 못하고 일종의 경련상태에 이르렀다. 보통사람이라면 심장의 경련은 심장마비와 기타 심각한, 때로는 치명적인 문제를 일으킬 수가 있다. 이런 사고는 해마다 수천 명의 건강한 사람들을 괴롭힌다.

그러나 스와미 라마는 이러한 심장이상에도 불구하고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 일은 의식의 직접적인 명령하에서 행해진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심장박동수가 정상이다가 갑작스러운 이상으로 불과 수분만에 죽는 사람들(모든 종류의 부정맥, 심장 세동(細動), 심빈박(心頻搏)이 이런 범주에 속한다)이 실제로는 의식의 손상을 겪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우리는 우리의 물질주의적 세계관에 비추어 이러한 손상의 원인을 심장근육의 탓으로 돌린다.

즉, 규칙적인 심장박동을 주관하는 전기화학 신호가 교란되었다는 것이다. 심장을 구성하고 있는 수십억개의 세포들이 전체의 유연하고 통일된 운동으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제각각으로 혼란스럽게 수축하여 심장을 마치 꿈틀대는 뱀이 든 주머니 모양으로 만들어 놓는다.

그러나 모든 심장전문의들이 두려워하는 이 끔찍스러운 광경은 2차적인 현상일 뿐이다. 심장세포 가운데서의 의식 손상이 1차적인 원인이다. 이 의식의 손상은 국부적인 손상이 아니라 전반적인 손상이다. 환자 자신이 자신의 모든 몸 세포를 다스리고 제어하는 지능의 심층차원과의 통신로를 잃어버린 것이다. 실상, 모든 세포는 눈에 보이는, 혹은 보이지 않는 다양한 층의 패턴으로 조직된 지능 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스와미 라마와 같은 도인은 우리의 의식이 그처럼 조각조각 파편화되고 축소되어야 할 것이 아님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만일 사람이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알게 되면 그는 자신이 이 지능의 흐름의 근원이며 경로이며 목표임을 깨달을 것이다. 세계의 종교 전통이 영(Spirit)이라고 부르는 그것은 온전히 하나로 이어진 전체(wholeness), 즉 의식의 모든 조각난 파편들을 굽어보고 있는 의식의 연속체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질병과 노화와 사망의 제물이 되었다. 의식을 잃는 것은 지능을 잃는 것이고 지능을 잃는 것은 지능의 최종산물인 인체에 대한 지배력을 잃는 것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패러다임이 우리에게 가르쳐 줄 수 있는 가장 값진 교훈은 이것이다.

즉, 몸을 변화시키고 싶다면 먼저 의식을 변화시키라는 것이다. 당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매우 기분이 이상할 정도로 당신의 자아관(自我觀)의 결과이다. 제1차 세계대전의 해전에서 독일 군인들은 가끔씩 전함이 침몰되어 구명보트에서 며칠, 혹은 일주일씩 구조를 기다려야만 했다. 여기서 어김없이 맨 먼저 죽는 것은 젊은 군인들이었다. 전에도 침몰 당했다가 살아난 적이 있는 베테랑 선원들은 위험을 뚫고 나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런 경험이 없는 젊은 선원들은 자신이 절망적인 상황에 빠져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죽어갔던 것임을 알아내기 전까지는 이 현상은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다.

이러한 사례에서 단서를 잡아, 동물실험 연구자들은 실험용 생쥐들을 물탱크 속에 빠뜨리는 등의 심한 스트레스 상황에 처하게 함으로써 이들을 빨리 노화시키거나 병들게 하여 죽도록 만들 수 있었다. 한번은 그러한 상황에 처해 본 적이 없는 동물들은 그것을 절망적으로 받아들이고는 금방 포기하여 죽어 버린다. 물탱크에 단계적으로 익숙해진 동물들은 그것을 견뎌 내어, 세포가 스트레스에 의해 파괴되는 증세를 보이지 않고 오랫동안 헤엄을 치면서 버틴다.

오랜 세월 동안 인간의 노화는 대부분 절망 때문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것이었다. 늙어간다는 것에 대한 두려운 상상이 노인들의 높은 발병률과 노인성 치매와 합세하여, 냉혹하며 자기충족적인 기대를 가져다 주었다. 노년은 몸과 마음이 점점 더 허약해지는, 피할 수 없는 쇠약과 상실의 시기이다. 이제 우리의 사회 전체는 노화에 대한 새로운 자각으로 깨어나고 있다. 60, 70대의 노인들이 40, 50대의 원기왕성한 건강상태를 당연한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 그 밑바닥에 깔려 있는 가정 - 인간은 늙어‘야만’ 한다는 것 - 은 그리 크게 변하지 않았다. 늙어야만 한다는 것은 우리가 낡은 패러다임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으로서, 의식의 전환이 새로운 사실을 백일하에 드러낼 수 있을 때까지 우리의 낡은 우주관 속에 하나의 사실로서 완강하게 자리잡고 있다. 우주관이란 우주의 무한한 에너지를 어떤 논리적인 틀 속에 정돈하는 하나의 방식론일 뿐이다.

노화는 모든 것이 변해 가고 사라지고 죽는 자연계의 틀 속에서는 합리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지능의 끝없는 흐름이 온통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세계 속에서는 그 합리성을 상실해 버린다. 어느 쪽의 관점을 받아들일 것인가는 당신의 선택에 달려 있다. 당신은 장미꽃이 피었다가 시드는 것으로 보기로 할 수도 있고 또는 그것을 끝없는 생명의 물결로 보기로 할 수도 있다. 다음해에는 그 장미의 씨앗에서 싹터 나온 새 장미를 보게 될 것이므로.

물질은 시간과 공간 속에 들어 있는 하나의 유폐된 순간이다. 우리 자신과 우주를 유물적인 시각으로 바라봄으로써 우리는 우주의 유폐된 측면이 과도한 중요성을 지니게 만든다. 이 책이 밝히고 있는 것처럼, 나는 여러분들의 우주관이 바뀔 때 존재란 것이 얼마나 유연하고 힘들지 않는 것일 수가 있는지를 깨닫게 되기를 바란다. 우리의 몸은 고형적인 물리적 외양에도 불구하고 흡사 강과도 같다. 헤르만 헤세가 영적인 소설 <싯다르타(Siddhartha)>에서 아름답게 묘사해 놓았던 그 신성한 강 말이다.

이 책 속에는 깨달음을 찾아 헤매는 구도자 싯다르타가 마침내 자신의 평화를 찾는 장면이 나온다. 여러 해를 방랑하던 끝에 그는 넓은 니란자 강가에서 발을 멈추는데 그때 내면의 소리가 이렇게 들려 온다. ‘이 강을 사랑하라. 그 곁에 머물러 그로부터 배움을 얻으라.’ 나에게는 이 속삭임이 생명의 과정 속에서 끊임없이 흐르고 흐르는 나의 몸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말해 주고 있다. 강과도 같이, 나의 몸은 순간의 바뀜과 함께 변화하며, 만일 내가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내 인생에 어떤 공백도, 새삼스러운 고통을 일으킬 과거의 어떤 아픈 기억도, 두려움을 가져올 미래의 상처에 대한 예상도 없을 것이다.

우리의 몸은 우리를 떠받쳐 주는 생명의 강이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너무나 겸손하여 우리의 인식조차 요구하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가만히 앉아서 몸에 가만히 귀를 기울인다면, 힘있는 어떤 지능이 그 속에 우리와 함께 깃들여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은 학문적인 지능이 아니라 하나의 세포 속에 짜여 들어 있는 수백만 년의 지혜에 버금가는 그런 것이다. 학문적인 지식은 그처럼 웅대하지는 못하다. 싯다르타는 그 강에 귀를 기울이고 배우기를 원했다. 이 점이 지극히 중요하다. 당신이 몸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배우려면 몸의 흐름과 다시 하나가 되기를 원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것은 당신의 낡은 관점이 간과해 왔던 지식에 대해서 기꺼이 마음을 열어 놓을 수 있어야만 한다는 뜻이다.

헤세는 이렇게 글을 이었다. “그에게는, 이 강과 그 비밀을 이해하는 자는 누구나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많은 비밀들을, 아니 모든 비밀을 이해하게 되리라고 생각되었다.” 당신에게 일어난 것은 모두 당신의 몸 속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새로운 가능성 또한 그 속에 있다는 것이다. 노화는 당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어떤 것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은 대부분 당신의 몸이 배워 온 것이다. 신체는 프로그래머인 당신이 입력시킨 것을 수행하도록 배워 왔다. 이 프로그램의 너무나 많은 부분이 당신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신념과 가정에 지배받는 무의식적인 것이어서, 당신이 알고 있는 것과 같은 물질세계를 가져다 준 사념체계를 모두 허물어뜨리는 일이 중요하다.

이제 우리는 몸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육체적 자아에 대해서 지니고 있는 친숙한 경험 속에 가장 개인적인 진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의 느낌에 대해서 편안해지면, 질서가 엔트로피와의 싸움에서 자꾸만 밀릴 때 모든 것 위에 덮쳐오는 공포의 그늘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믿도록 배워 온 세계는 그런(질서가 엔트로피 앞에서 밀리는) 세계이다. 그러나 또다른 방식이 있고 다른 세계가 있다. 이것이 싯다르타가 강에서 배운 가장 큰 교훈이었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는 가장 친한 친구이자 동행자인 바수데바에게 그것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자네도 강의 비밀을 깨달았는가? 시간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을 말이야.”

바수데바의 얼굴에 밝은 미소가 퍼졌다. “그렇다네, 싯다르타. 자네가 말하는 것이 이것이 아닌가? 강은 동시에 모든 곳에 존재하지. 그 근원에도, 하류에도, 폭포에도, 나루터에도, 흐르는 줄기에도, 바다에도. 그리고 강에게는 과거의 그림자도, 미래의 그림자도 없이 오직 현재만이 존재한다는 것 말일세.”

“바로 그거야.”하고 싯다르타가 말했다. “그리고 내가 그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내 인생을 다시 돌아보았고 그것 또한 하나의 강이었네. 어린 싯다르타와 젊은 싯다르타, 그리고 늙은 싯다르타는 실재가 갈라놓은 것이 아니라 단지 그림자에 의해 분리된 것일 뿐이었지.”

그는 기쁜 표정으로 말했으나 바수데바는 그저 환한 미소를 보내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수세기에 걸쳐 물질주의가 조장해 온 망상은 우리가 강을 정복하여 그 흐름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만일 그렇게 했다면 그로부터 얻는 유일한 것은 죽음일 것이다. 우리 각자에게 진리인 것은, 우리의 삶이 더욱 더 큰 경험의 장으로 확장되어 나간다는 것이다. 한 사람의 존재 속에 집약되는 에너지, 정보, 그리고 지능에는 한계가 없다.

이러한 무한의 창조성은 그 육적인 형태로서 당신의 세포 속에 육화되어 있다. 또한 드러나지 않는 형태로서, 말해지지 않았으나 가능한 모든 의미, 가능한 모든 진리, 가능한 모든 창조로 충만해 있는 공(空), 즉 마음의 침묵 속에 표현되어 있다. 모든 원자의 핵심 속에 존재하는 공은 우주의 자궁이다. 두 개의 뉴런이 상호작용할 때 명멸하는 사념 사이에 새로운 세계 탄생의 기회가 존재한다. 이 책은 시간의 호흡이 시들지 않고 오직 새로워질 뿐인 바로 그 침묵의 탐사에 관한 것이다. 아무도 늙지 않는 땅을 찾으라. 그곳은 다름 아닌 당신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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