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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글쓴이  :   피라밋 (2006.07.22 - 13:48)
  비베카난다의 근원에 머물기 (합본) - 1
“비베카난다”의 강연을 모은 책 “근원에 머물기”의 내용들입니다.
내용은 비베카난다가 미국과 영국을 돌며 강연한 그만의 베단타를 바탕으로 합니다.
“베단타”란 인도의 가장 오래된 경전인 “베다"가 가르치는 철학을 말합니다.

그 기본 가르침은 인간의 진정한 본성은 신이라는 것이다.
신은 우리 내면에 있는 참자아이며, 모든 존재 안에 깃들여 있는 본연의 실재이다.
따라서 종교란 참자아를 찾는 것, 곧 내면의 신을 찾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구원 받을’ 필요가 없다. 우리에게 있어 가장 큰 문제는 우리가 자신의
진정한 본성을 잊고 밖에서 구원을 찾고 있다는 것이다.  - 본문 중에서 -


1. 나는 누구인가

참 자아에 굳건히 서십시요.
그래야만 우리는 진실로 세상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높이, 더 높이 오르십시오. 우리의 우주적 본성을 알면
세상의 모든 파노라마를 완전한 평정의 눈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껍질

인간은 먼저, 육체라는 거친 덮개를 입고 있으며, 다음으로는 마음, 지성, 자아(에고)라는 보다 섬세한 몸을 입고 있습니다. 그것들 너머에 인간의 참자아가 존재합니다. 인간의 거친 육체가 지닌 그 모든 자질과 능력은 마음에서 빌려온 것입니다. 그리고 좀 더 섬세한 몸인 마음은 그 너머에 있는 영혼으로부터 능력과 빛을 얻습니다.

우리는 모든 존재가 신성하며 존재 자체가 바로 신임을 믿습니다. 모든 영혼은 무지라는 구름에 가린 태양과 같습니다. 개개 영혼에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구름의 두께 차이일 뿐입니다.

인간은 무의식도 모르고 초의식도 모릅니다. 우리는 단지 의식만을 알 뿐입니다. 어떤 이가 일어서서 “나는 죄인이다”라고 말한다면, 그 말은 옳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야말로 인간에 대해 가장 무지한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의 한 부분만 알고 있습니다. 자신에 대한 이해가 자기 존재의 일부분에만 그친 까닭입니다.

우리는 진정 영원한 존재인 정신을 보지 않고 육체에 집착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내 몸이 바로 나’라고 말하는 사람은 타고난 우상숭배자입니다. 우리는 정신입니다. 정신은 모양도 형태도 없습니다. 정신은 무한합니다. 물질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개체성을 잃을까 두려워합니다. 돼지가 신이 될 수 있다면 돼지라는 개체성을 잃어버리는 것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하지만 가련한 돼지는 돼지로 사는 동안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못합니다. 나의 ‘나 됨’이란 어떤 상태입니까? 어린시절 방바닥에 누워 손을 빨고 있는 존재일까요? 그것이 바로 내가 잃어버리기 아쉬워하는 개체성이란 말입니까? 앞으로 오십 년쯤 지난 후에는 내가 어린 시절을 회상하듯 지금의 상태를 회상하며 웃음 지을 것입니다. 내가 간직해야 할 그 개체성이 무엇이란 말입니까.

어머니, 아버지, 자녀, 배우자, 육체, 재산 등-이 모든 것들은 언제든지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참자아는 결코 잃을 수 없습니다...그러니 참자아 안에서 자족하십시오. 우리가 소망하는 모든 것이 참자아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참자아가 바로 영원히 변치 않는 ‘나 됨’입니다. 참자아는 완전합니다.


나의 영혼은 우주적 자아

유한한 것으로 가득 찬 이 현상계 안에서 무한을 보고 발견한다는 것은 극히 어렵습니다. 무한은 오직 무한한 것 속에서 찾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오직 하나, 무한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 안에 있는 자신의 영혼입니다. 몸도 마음도, 우리 생각이나 눈에 보이는 이 세상도 무한하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속해 있는 ‘보는 자’,인간의 내면 속에 깨어 있는 참자아, 오직 그것만이 무한합니다. 그러니 우주의 궁극적인 근원을 찾으려면 그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무한한 참자아 속에서만 무한의 근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참자아는 물질로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다. 참자아는 결코 나눌 수 없는 하나입니다. 따라서 결코 파괴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자아는 시작이 없습니다. 시작도 없기에 끝도 없습니다.

세상에는 좋은 것도 없고 나쁜 것도 없으며, 이 둘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습니다. 동일한 어떤 것이 좋을 수도 있고 때로는 나쁠 수도 있습니다. 단지 각 단계에 따라 다르게 인식될 뿐입니다. 오늘 즐겁다고 말한 것을 내일 보다 나은 환경에서 고통이라 말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를 따뜻하게 해주는 불이 우리를 태워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결코 불의 잘못이 아닙니다.  
우리의 참자아는 순결하고 완전합니다. 악을 행하는 사람은 자신의 본성을 모르기 때문에 그 본성에 거스르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살인자 안에도 순수한 참자아가 존재합니다. 순수한 참자아는 죽지 않습니다. 살인은 그의 실수였습니다. 그의 참자아가 발현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의 참자아는 가려져 있었습니다. 살해당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의 참자아는 죽지 않습니다. 참자아는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기쁨의 순간이 지나면 괴로움이 다가옵니다. 그 간격은 멀 수도 있고 가까울 수도 있습니다. 영적으로 더 진보한 사람일수록 기쁨 혹은 슬픔 속에 오래 머무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행복도 아니고 괴로움도 아닙니다. 행복이나 괴로움은 자신의 진정한 본성을 잊어버리게 만듭니다. 하나는 쇠로 만들어졌고 다른 하나는 금으로 만들어졌다 해도 둘 다 사슬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 둘의 배후에는 아트만(영원한 자아)이 있습니다. 아트만은 행복도 알지 못하며 괴로움도 알지 못합니다. 기쁨과 괴로움은 현상에 지나지 않으며 현상이란 변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참자아의 본성은 지복,평화, 불변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얻고자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간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불순물을 걷어 내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참자아가 저절로 그 모습을 드러낼 것입니다.
참자아에 굳건히 서십시요. 그래야만 우리는 진실로 세상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높이, 더 높이 오르십시오. 우리의 우주적 본성을 알면 우리는 세상의 모든 파노라마를 완전한 평정의 눈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인간이 거울을 통해 자신의 얼굴을 완전하고 뚜렷하고 맑게 보듯이, 진리는 인간의 영혼을 거울 삼아 그 모습을 비춥니다. 하늘 위의 하늘은 우리 자신의 영혼 속에 깃들여 있습니다. 가장 거룩한 사원은 바로 인간의 영혼입니다.

온 우주는 하나입니다. 우주에는 오직 하나의 자아, 하나의 존재가 있습니다. 그 하나의 존재가 시간과 공간과 인과를 스치며 저마다 다른 이름, 지성, 섬세한 물질, 거친 물질 등 모든 정신적 물리적 형태를 얻습니다. 우주의 모든 것은 그 하나가 다양한 형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즉, 전체인 하나의 작은 부분이 시간과 공간과 인과의 그물망에 들어오게 될 때 형상을 부여 받게 됩니다. 그 그물망을 벗어나면 모두가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불이론(不二論)의 가르침에서 전체 우주는, 브라흐만이라 부르는 우주적 자아 안에서 모두 하나입니다. 우주적 자아가 우주의 배후에 나타날 때는 신이라 불립니다. 그리고 육체라는 이 작은 우주에 나타날 때는 영혼이라 불립니다. 그러므로 영혼은 인간 안에 깃들인 우주적 자아인 것입니다.

우주의 영혼(아트만, 영원한 자아)은 깊은 괴로움과 타락의 한 가운데로 한 줄기 빛을 보냅니다. 그리하여 인간은 깨어나 자신의 본 모습, 결코 상실할 수 없는 참자아를 발견합니다. 아니,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본성을 결코 잃을 수 없습니다. 누가 자신의 존재를 잃을 수 있습니까? 누가 자신의 존재성을 상실할 수 있습니까?

내가 만일 선하다면, 먼저 내가 존재해야하고, 그 다음에 선이라는 질료로 채색되는 것입니다. 내가 만일 악하다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존재가 가장 먼저이며 언제나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결코 잃어버릴 수 없으며 영원히 현존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이에게 희망이 있습니다. 아무도 죽을 수 없습니다. 아무도 영원히 타락할 수 없습니다. 삶이라는 놀이가 아무리 격렬하다 할지라도 하나의 놀이터일 뿐입니다. 우리는 얻어맞을 수도 있고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참자아는 그곳에 있으면서 결코 상처 입지 않습니다. 우리는 바로 무한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신이라면

내가 신이라면 나는 감각에 이끌리지 않게 되어 악을 행하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도덕이 인간의 목표는 아닙니다. 그러나 자유를 얻는 수단입니다.

육체, 정신, 영혼으로서 당신은 한낱 꿈입니다. 당신의 참 모습은 실재-의식-지복[사트(sat)-치트(chit)-아난다(anasda), 브라흐만의 속성]입니다. 당신은 이 우주의 신입니다. 당신은 온 우주를 창조하고 있으며 온 우주를 사그러지게도 합니다.

내 안에 실재하는 모든 것이 다 신입니다. 신 안에 실재하는 모든 것은 나입니다. 신과 인간의 간극에는 이렇듯 다리가 놓여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신을 앎으로써 우리 안의 천국을 발견합니다.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나는 곧 신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감각적 세계를 통해서는 구현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신을 알 수 없지만, 모른다 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신을 다른 어떤 것보다 무한히 더 높은 존재로 여길 뿐입니다. 사실 신은 우리와 하나입니다. 우리와 하나인 것은, 우리가 자아에 대해 그렇듯, 알 수도 없지만 모른다 할 수도 없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자아를 알 수 없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자아를 밖으로 내몰 수도 없고 그것을 대상화시켜 볼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바로 그 자아이기 때문이며 그것으로부터 당신 자신을 분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편 당신은 당신의 자아를 모른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자아에 대해 당신 자신보다 더 잘 아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진정 우리 인식의 중심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신을 알 수 없지만 모른다 할 수 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의 인식 범위 넘어서 무한히 높은 존재로 여길 뿐입니다. 그러나 신은 우리의 참자아입니다.

나는 나 자신을 신과 나로 나눕니다. 나는 예배 받는 자가 되기도 하지만, 자신에게 예배하기도 합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신은 나입니다. 나의 참자아에 예배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우주의 신-그가 바로 나의 참자아입니다. 참자아에 예배하는 것은 참으로 즐겁습니다. 이 즐거움 외에 삶의 다른 목적은 없습니다.


당신은 무한합니다.

신만이 실재합니다. 우주는 한낱 꿈입니다. 이 순간 나는 영원 무궁한 자유를 알았고, 예배의 대상이 오직 자신임을 알았으니 그 얼마나 복된지...천지 만물도 미망의 사슬도 그 어떤 것도 나를 구속하지 못합니다. 이제 내게는 만물도 사라지고 신들도 사라지고 예배도 사라지고...우상숭배도 사라졌습니다. 나는 나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무한합니다. 내게서 이 모든 것-모든 여신과 남신, 책임과 행복과 괴로움-이 사라졌습니다. 나는 무한합니다. 어떻게 내게 죽음이나 탄생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겠습니까? 내가 ‘유일자’입니다. 그러니 내가 어떻게 자신을 두려워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누구를 두려워할 수 있습니까? 나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나 외에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나는 모든 것입니다.

당신은 무한합니다. 당신이 어디로 갈 수 있습니까? 해와 달과 온 우주가 당신의 초월적 본성 안에 맺힌 작은 이슬 방울입니다. 당신이 어떻게 태어나고 죽을 수 있습니까? 나는 결코 태어나지도 않았고 태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내게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친구도 적도 없습니다. 나는 존재이며 지혜이며 절대 지복이기 때문입니다.

완전함은 언제나 무한합니다. 우리는 이미 무한합니다. 다만 그 무한을 다 드러내지 않았을 뿐입니다. 당신과 나 그리고 모든 존재는 무한을 드러내려는 과정에 있습니다.


호수의 바닥

호수의 바닥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수면이 늘 잔물결로 일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물결이 잔잔해지고 물살이 평온해졌을 때, 그 바닥을 엿볼 수 있을 뿐입니다. 흙탕물이 일거나 물살이 거세게 움직이면 바닥은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물이 맑고 물살이 잦아든다면 바닥을 볼 수 있습니다. 호수 바닥은 우리 자신의 참자아입니다.

당신은 전지자이며 온 우주에 편만한 존재입니다. 그러니 그런 존재들이 여럿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수백 수천 수백만의 편만한 존재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를 이루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당신이 유일자입니다. 오직 하나의 참자아만이 존재합니다. 그 참자아가 바로 당신입니다.

우리가 어떤 신을 인식하면서, 자신으로부터 분리된 외부의 대상으로 예배했던 존재는 사실은 유일한 참자아입니다, 그것은 언제나 당신의 참자아였으며, 그것만이 유일한 존재, 유일한 신입니다.

참자아(아트만)는 본성적으로 순수합니다. 참자아는 가장 하찮은 벌레에서 가장 완전한 존재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동일하게 반영하고 있는 우주의 유일한 존재입니다. 이 우주 전체는 한 몸이며, 물리적으로나 정신적, 도덕적, 영적으로 오직 하나의 존재입니다. 우리는 다양한 형태 속에 깃들인 이 하나의 존재를 바라보는 것이며, 그것을 반영하는 온갖 이미지들을 창조합니다.

참자아를 기수로 육체를 마차로, 지성을 마부로, 마음을 고삐로, 감각을 말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말이 잘 훈련되어 있고, 고삐가 튼튼하고 마부(지성)의 손에 잘 맞으면, 그는 본연의 상태라는 목적지, 곧 온 우주에 편만한 신성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말(감각)이 잘 통제되지 않고 고삐(마음)가 잘 조절되지 않는다면 엉뚱한 길로 가고 말 것입니다.
눈이나 감각으로는 모든 존재 안에 깃들인 아트만에 가 닿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순수하고 정화되어 있는 사람은 그(아트만)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아트만을 깨닫는 사람은 죽음의 골짜기에서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운명 일구기

우리가 여기 이 짧은 시간적 공간 속에서 스스로의 운명을 일구어 나간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또한 모든 것이 원인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의 현재는 모든 과거의 결과라는 것 또한 사실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 자신 외에는 그 어떤 존재도 인간의 운명을 결정할 수 없습니다.

깨달음은 하나의 길, 즉 경험의 길에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우리가 이 생에서 경험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다른 생에서 경험했을 것입니다.

당신도 나도 현존하는 그 누구도 무에서 나오지 않았으며 무로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히 존재해 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해 아래 혹은 해 위의 어떤 능력도 당신이나 나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무로 돌아가게 만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환생의 가르침은 놀라운 것이 아닐 뿐더러, 인류의 도덕적 완성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인간마다 깨달음을 얻는 능력에 엄청난 차이가 존재합니다. 환생 이외의 다른 이론으로는 이 차이를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부싯돌에 숨어 있는 불꽃처럼, 지식은 마음속에 숨어 있습니다. 그리하여 생각의 마찰을 통해 앎이라는 불꽃이 피어 오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감정과 행동-눈물과 웃음, 기쁨과 슬픔, 흐느낌과 미소, 저주와 축복, 칭찬과 비난-에 흔들리지 않고 조용히 우리 자신을 탐색한다면, 이 모든 것들이 자신 속에서 몰아치는 숱한 바람에 의해 타오른 불꽃임을 깨달게 될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가 된 것입니다. 함께 어우러진 이 모든 바람을 카르마, 곧 업이라 부릅니다.

깨달음이 우리 자신 안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기까지, 이 길에서는 아무도 우리를 도울 수 없다는 것을 알기까지, 결국 자신이 스스로를 도와야 한다는 것을 알기까지, 우리가 추구하는 모든 것은 헛됩니다.

육체가 죽으면 영혼은 어디로 갑니까? 육신이 살아 있을때 취한 모든 행위, 모든 생각들이 한데 어울려 그 결과를 결정합니다. 그 결과가 앞으로의 경험을 위해 새로운 육체를 필요로 하는 것이라면, 그 영혼은 새 몸을 위해 적절한 질료를 공급할 준비가 된 부모에게로 갈 것입니다.


윤리의 기초

모든 윤리적 규범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나보다는 당신’입니다. ‘나’는 현상계의 배후에 존재하는 무한에서 나온 것이며, 외부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려는 움직임에서 발현된 것입니다. 이 작은 ‘나’는 그 결과물일 뿐입니다. 그것은 다시 본성인 무한으로 돌아가 무한과 하나가 될 것입니다. 당신이 ‘나보다는 내 형제, 당신’이라고 말할 때마다 당신은 무한으로 돌아가려고 노력하는 것이며, ‘당신보다는 나’를 우선할 때마다 당신은 감각적 세상을 통해 무한을 드러내려는 잘못된 길을 밟는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에 투쟁과 악을 가져 옵니다. 그러나 정해진 때가 지나고 나면 자기 소멸, 영원한 소멸이 오게 마련입니다. 이 작은 ‘나’는 죽어 사라지는 것입니다.

상대적 지식이 필요할 때도 잇습니다. 그것이 때로는 절대의 지식으로 우리를 이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감각이나 정신은 물론 베다의 가르침이라 할지라도 그것 자체가 진리는 아닙니다. 이들은 모두 상대적 지식의 영역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나는 육체’라고 하는 미망을 벗어 버리십시오. 그런 다음에야 진정한 지식을 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상대적 지식이란 짐승의 지식이 조금 높아진 것에 불과합니다.

개개의 영혼은 누구나 신성의 싹을 지니고 있습니다. 각 영혼의 목표는 외면과 내면의 본성을 통제함으로써 자기 안에 깃들인 신성을 꽃피우는 것입니다. 일을 하거나 예배를 드리거나 마음을 다스리거나 철학적 탐색을 하거나 - 이 모든 것 중 한두 가지 혹은 전부를 하든지 - 오직 이 신성의 발현에 집중하십시오. 이것이 종교의 전부입니다. 교리나 도그마, 의식, 경전, 사원 혹은 종교적 형식 등은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슬 방울마다 같은 태양이

베단타 가르침의 정수는, 오직 하나의 존재가 있고 각 영혼은 저마다 그 존재(부분이 아닌 온전한 전체)를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슬 방울 하나 하나마다 태양의 전부가 투영되어 있습니다.  

베단타의 이상은 모든 지혜, 완전한 순수가 이미 영혼에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단지 그것이 희미하게 표현되는가 뚜렷이 표현되는가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인간 저마다의 차이, 창조 세계의 모든 만물의 차이는 그 종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각 존재의 수준에 달려 있습니다. 모든 것의 실체인 근원은 똑같이 영원하고 거룩하고 순수하며 완전한 ‘유일자’입니다. 그것이 바로 아트만, 영원한 자아이며, 성자나 죄인, 행복한 사람, 불행한 사람, 아름다운 것이나 추한 것, 사람이나 동물 모두에게 두루 똑같습니다. 그것은 빛나는 하나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표현 능력에 따른 차이일 뿐입니다. 어떤 이에게는 더 뚜렷이 표현되는가 하면 또 다른 이에게는 미미하게 표현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표현의 차이가 있다하더라도 내면의 아트만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현상으로 드러나 존재로서 우리는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실재는 하나입니다. 우리가 자신을 그 하나와 일체라고 생각할수록 우리에게는 유익합니다. 우리가 자신을 전체와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할수록 우리는 더욱 불행해집니다. 만물이 한몸이라는 전일적 가르침으로부터 우리는 인간 윤리의 기본을 배우게 됩니다. 그러므로 나는 감히 말합니다. 이것 외에는 다른 어떤 윤리도 얻을 수 없다고.

더없이 순수하며 완전한 불멸의 영인 우리가 자신은 한낱 정신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거나 한낱 육체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무지의 소산입니다. 그것은 모든 이기심의 어머니이기도 합니다.

내가 나를 육체라고 생각함으로써 다른 육체를 희생시켜 내 몸을 보호하고 멋지게 유지하려 한다면, 그 순간 당신과 내가 분리되는 것입니다. 분리심이 생겨나는 순간 모든 타락의 문이 열리고 우리는 온갖 불행으로 내몰리는 것입니다.

실체에 있어서, 그 근원에 있어서, 모든 존재는 다 같습니다.


2. 인간의 조건

우리에게 필요한 세 가지가 있습니다.
느끼는 마음과 생각하는 머리와 일하는 손이 그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세상에 나가,
세상에 필요한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자신을 발전기로 삼으십시오.
당신이 먼저 세상을 불쌍히 여기십시오.
모든 인간이 세상을 위해 일할 준비가 되어 있을 때,
그제야 세상을 염려하려 합니까?


선과 악의 힘

악을 행하지 않고서는 선을 행할 수 없음이 사실이라면, 행복을 만들어 내려 할 때마다 그곳에는 언제나 불행이 함께 생겨 난다면, 사람들은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그렇다면 선을 행하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그 대답은 이렇습니다. 첫째로, 선을 행하는 것은 우리의 불행을 줄이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이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조만간 누구나 삶에서 그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지혜로운 이는 좀더 일찍 알아차리고 우둔한 자는 좀더 늦게 알아차릴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들은 그 사실을 발견하기까지 값비싼 대가를 치르지만 지혜로운 자는 보다 적은 대가를 치르고도 그 사실에 이를 것입니다. 둘째로, 선을 행하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우리의 몫입니다. 그것만이 이 부조리한 삶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꿈에서 깨어나 이 진흙 덩어리의 몸을 벗어나기까지, 선과 악은 둘 다 이 우주가 우리를 위해 살아 움직이도록 하는 힘입니다. 우리는 이 교훈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그것을 배우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악은 다른 존재에서 기인한 것이 아닙니다. 이 모든 악을 유발한 것은 우리 자신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악한 행위에서 비롯된 결과들을 계속해서 대면할 때마다, 우리는 세상에 존재하는 숱한 불행이 인간이 사악하기 때문에 빚어진 결과라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책임은 오직 인간에게 있습니다. 결코 신을 비난할 수 없습니다.

행복과 불행은 언제나 함께 맞물러 늘 우리 인식에 닿아 있습니다. 이들은 우리에게 고통을 주기도 하고 기쁨을 주기도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행복과 불행이라는 질료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이들을 없앨 수 없습니다. 생명의 모든 박동마다 행복과 불행이 함께 고동칩니다. 세상은 이 상반된 것들을 화해시키려고 분주합니다. 현자들은 이 극단의 것들을 조화시키는 해결책을 알아내고자 애쓰는 것입니다.

도덕적 용기에서 비롯된 의로운 일은, 반대에 직면하게 되면 오히려 더욱 힘을 북돋게 됩니다. 아무런 장애도 저항도 없는 일은 인간을 도덕적 죽음의 길로 이끌 뿐입니다. 투쟁은 살아 있다는 표시입니다.

세상에 주어진 영원한 행복이 있습니까? 대양 어딘가 움푹 들어간 곳이 없다면 결코 파도는 일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선한 것들의 합계는 도처에 존재하는 인간의 욕구 및 탐욕과 동일한 양입니다. 그것은 증가할 수도 없고 감소할 수도 없습니다.


국가

모든 성장, 진보, 안녕 혹은 퇴보는 다만 상대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저마다의 기준에 따른 것입니다. 그리고 개개 인간의 이해는 각자의 인식 기준에 따른 것입니다. 이 사실은 국가의 경우에서 더욱 뚜렷이 드러납니다. 어떤 나라에서 선한 것으로 인식되는 것이 다른 나라에서는 그렇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모든 고대 인류의 신화마다 영웅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신화에 등장하는 영웅들은 저마다 그 인생에 운명처럼 부여된 특정한 신체적 약점이 있어, 그곳을 건드리기 전까지는 죽을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마치 각 나라가 특정한 운명의 중심을 가지고 있어 그곳을 건드리기 전까지는 숱한 불행과 불운이 그 나라를 파멸시킬 수 없는 것과도 같습니다.

각 나라는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일정한 유형을 지니고 있습니다. 각 나라는 지속적으로 다른 나라들로부터 사상을 받아들여 그것을 자기 나라의 입장에 따라 적용합니다. 유형들 자체가 파괴되는 때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근원에서 온 모든 가르침은 각 국가에 존재하는 이상들과 양립합니다. 그 이상들은 국가화, 즉 다른 것들과 더불어 국가의 개체성을 유지하는 노선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는 기본이 되는 어떤 공통의 기반이나 이해 근거, 인간성 등이 존재합니다. 우리는 존재하는 어느 자리에서나 적용되는 완성되고 완전한 인간적 본성을 찾아야 합니다. 한 인간이 모든 것을 완벽하게 갖출 수는 없습니다. 당신은 어느 한 역할을 감당합니다. 그리고 나 역시, 비천하나마 나의 역할이 있습니다. 완전함이란 이 모든 부분이 함께 조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개인과 마찬가지로 국가도 그렇습니다. 각 민족은 저마다 역할이 있습니다. 각 종족은 저마다 발전시켜야 할 인간 본성의 한 면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모든 것을 하나로 모아야 합니다. 어쩌면 머나먼 장래에, 각기 다른 종족들이 지닌 놀라운 개별 종족의 완전성을 두루 갖춘 종족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들이 함께 모이면 마치 세상이 꿈에서 깨어나듯 새로운 종족이 형성될 것입니다,

각 나라 사람들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그 나라에서 발현되는 이상을 나타냅니다. 개인은 이상이 외부로 구현된 형태입니다. 그런 개인의 모임이 바로 국가입니다. 국가는 자국이 추구하는 하나의 위대한 이상의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한 국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나라의 이상을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각 국가는 자국의 기준이 아닌 다른 나라의 기준에 의해 평가되기를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국가가 대양을 정복할 수도 있고 원소를 통제할 수도 있고 마지막 한계로 보이는 생명의 실용화 문제까지 발전시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높은 문명은, 자아를 정복하는 법을 배운 어느 개인 안에서 발견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진리는 고대나 현대 어떤 사회에도 고개를 숙이지 않았습니다. 사회가 진리 앞에 고개를 숙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멸할 것입니다. 사회는 진리를 본떠 만들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진리는 자신을 사회에 맞추어서는 안 됩니다.

종교는 오직 영혼과 관계해야 하고 사회적 문제에 개입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해악은 종교가 사회적 문제에 개입함으로써 비롯된 것입니다. 종교가 사회에 남긴 해악이란, 마치 인간이 다른 사람의 재산을 강제로 빼앗은 후, 그것을 다시 찾고자 애쓸 때 코웃음 치면서 한편으로는 인간 권리의 존엄성에 대한 원칙을 설교하는 것과 같습니다.

종교는, 사회의 법을 만들거나 존재간의 차별을 주장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종교의 이상과 목표는 그런 모든 허구와 기괴한 작태를 말소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역사

불평등은 인간 본성에 침투한 독이며 인류에 대한 저주이며 모든 불행의 뿌리입니다. 이것은 모든 육체적 정신적 영적인 속박의 근원입니다.

소위 사회적 개혁에 관여하지 마십시오. 영적인 개혁이 선행되지 않고서는 그 어떤 개혁도 있을 수 없습니다.

세상의 불행은 어떤 인간 단체가 본질적으로 다른 단체보다 더 지적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지적으로 우월한 까닭에,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누리는 물질적 즐거움마저 빼앗아 간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의 싸움은 그 특권을 파기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고통과 쾌락을 한 사람이 점유하게 하기보다는 모두에게 재분배하는 것이 낫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선과 악의 총량은 언제나 같습니다. 그러므로 체계란 멍에를 다른 어깨 위로 옮기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자유는 분명 우리가 가진 것을 거리낌없이 남용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 자신의 육체, 지성 혹은 재산을 우리 의지에 따라 사용하는 것은 본연의 권리이나 결코 다른 사람에게 해를 주어서는 안 됩니다. 사회의 모든 구성원은 재산과 교육과 지식을 확보할 동일한 기회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인류의 수호자가 되려고 노력하거나 죄인을 개심시키는 성자로서 존경받고자 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자신을 정화합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결과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돕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신을 우주의 무한한 존재와 하나라고 여길 때, 모든 차별은 사라질 것입니다. 모든 남성과 여성, 모든 신들과 천사들, 동물과 식물들, 전체 우주가 그 ‘하나임’속에 녹아들 때 모든 두려움이 사라질 것입니다.

자유주의는 그 초연한 속성 때문에 오래도록 살아남지 못합니다. 자유는 인류에게 맹신을 부추길 수 없고, 배타적 증오심을 불러일으킬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자유주의가 계속해서 몰락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자유주의는 오직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그들이 왜 자유주의를 신봉하는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자유주의는 우리를 이타적으로 만들고자 합니다. 그러나 우리들 대부분은 이타적이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이타성 안에서는 당장 무언가를 얻을 수 없어 보입니다. 이기적이 되어야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난할 때,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을 때에만 자유주의를 받아들입니다. 돈과 권력을 쥐는 순간 우리는 보수적으로 변합니다. 가난한 사람은 민주주의자입니다. 부자가 되면 그는 귀족주의자가 됩니다. 종교에서도 역시 인간의 본성은 같은 방식으로 활동합니다.

관용이라는 단어는, 자신이 높은 지위에 있다고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을 얕보고 동정하는 오만한 사람과 결탁해 왔습니다. 이것은 정신의 타락입니다. 우리는 모두 같은 목적지를 향해 함께 여행길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사람마다 다양한 정신적 요구에 따라 제각기 다른 길을 걸어갑니다. 우리는 획일성을 벗어나야 합니다. 참으로 우리는 다면적인 성품을 지녀야 합니다. 그것은 관용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보다 더 중요하게, 다른 이들과 공감하고 다른 길을 가 보며 신을 찾는 추구와 열망을 함께 나누기 위함입니다.

주전자의 물이 끊어 오르는 현상을 지켜보면, 먼저 하나의 물방울이 올라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또 한 방울이 떠오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모든 물방울이 한데 어울려 주전자 속에는 거대한 소요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도 이와 같습니다, 각 개인은 하나의 물방울과 같고 나라들은 많은 물방울들의 모임과 닮아 있습니다. 점차 이 나라들은 한데 어울리게 될 것입니다. 나는, 모든 분리가 사라지고 우리 모두가 지향하는 그 ‘하나됨’이 구현되는 날이 오리라고 확신합니다. 모든 인간이 과학적이고도 영적인 세상에서 열정을 갖고 일하는 때가 와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 하나됨의 조화가 온 세상에 두루 미치는 날이 와야 합니다. 온 인류가 지반무크타(육체를 입고 있지만 이미 깨달음을 얻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때로 질투와 증오로, 때로는 사랑과 협조로 하나의 목적을 향해 투쟁하고 있습니다. 거대한 물줄기가 우리를 싣고 대양을 향해 흘러가고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지푸라기나 종이 조각처럼 아무 지향 없이 표류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침내 우리는 생명과 지복이라는 대양을 만날 것입니다.


발전기처럼

우리에게 필요한 세 가지가 있습니다. 느끼는 마음과 생각하는 머리, 일하는 손입니다. 우리가 먼저 세상에 나가, 세상에 필요한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자신을 발전기로 삼으십시오. 당신이 먼저 세상을 불쌍히 여기십시오. 모든 인간이 세상을 위해 일할 준비가 되어 있을 때, 그제야 세상을 염려하려 합니까? ...세상 속에서 당신의 사랑과 겸손을 시험하십시오.
질투하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도 아니고 사랑이 있는 사람도 아닙니다. 질투는 끔찍하고 무서운 죄입니다. 그것은 미묘한 방식으로 인간에게 들어옵니다. 자신에게 물어 보십시오. 당신의 마음은 증오나 질투 때문에 반응하고 있지 않은지.
세상에 엄청난 양으로 쏟아 부어지는 증오와 분노 때문에 선한 일은 계속해서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순수하고 강하다면, 한 사람이 온 세상과 맞먹는 힘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세상이라는 이 지옥에서 누군가 단 하루만이라도 단 한 사람의 마음에 작은 기쁨과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있다면, 그가 홀로 있었던 많은 시간은 진실된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온 생애의 고통을 통해 배운 것입니다. 그 밖의 다른 모든 것은 달빛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간이 역사를 다른 각도에서 연구하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리하여 경쟁이란 원인도 결과도 아니며 단지 길 위에 놓인 것일 뿐 진화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결혼한 사람의 삶은 종교에 몸을 바친 독신자의 삶 못지 않게 위대합니다. 거리의 청소부는 옥좌에 앉은 왕과 다름없이 위대하며 명예롭습니다. 그를 왕좌에서 끌어내려 청소부의 일을 시켜 보십시오. 그리고 그가 어떻게 청소하는지 지켜보십시오, 청소부를 왕좌에 앉히고 그가 어떻게 통치하는지 보십시오, 세상을 떠나 살던 자가 세상에 속하여 살던 자보다 더 위대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세상에 속한 채 신을 경외하며 사는 것이 세상을 버리고 자유롭고 편안하게 사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습니다.

인류의 미래에도 계속되어야 할 것은, 인격을 완성하기 위한 노력, 진리를 깨달으려는 강렬한 투쟁입니다.

우리가 지켜야 할 원리는 사랑이지 동정이 아닙니다. 영혼을 지닌 생명체에 대해 감히 동정을 말하는 것은 지각없고 무분별한 행동입니다. 우리가 품어야 할 것은 연민이 아니라 경외심입니다. 우리가 지녀야 할 것은 연민의 감정이 아니라 사랑의 감정이며, 모든 것 속에서 참자아를 느끼는 것입니다.

완전한 성실, 거룩함, 거대한 지성, 그리고 모든 것을 정복하려는 의지, 단 몇 사람이라도 이런 정신으로 일한다면 온 세상에 대변혁이 일어납니다.


3. 자유에 대한 열망

인간의 몸이라는 사원 안에 신이 앉아 있음을 깨달은 순간,
모든 인간 존재에게서 경외를 느끼며 인간 안에서 신을 본 순간,
그 순간, 나는 속박에서 자유로워졌습니다.
나를 구속했던 모든 것이 사라지고
나는 자유를 얻었습니다.


자유

베단타에서는 말합니다. 세상 모든 현자들이 찾아왔던 자는 우리 자신의 가슴 속에 있으며, 당신이 들었던 목소리는 옳았다고, 그러나 당신이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 방향이 틀렸습니다. 당신이 생각했던 자유의 이상은 맞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그것을 당신 외부에 투사했습니다. 그것이 당신의 실수였습니다. 그 이상을 가까이, 더 가까이에서 찾으십시오.
그러면 마침내 그것이 언제나 당신 안에 있었으며 당신 자신의 참자아였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자유는 당신 자신의 본성이었습니다. 이 마야(환영)는 결코 당신을 속박한 적이 없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부싯돌이나 마른 나무 안에  불꽃이 들어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불을 불러 내기 위해서는 마찰이 필요합니다. 자유와 순수라는 불꽃은 개별적 특성이 아니라 모든 영혼의 본성입니다. 왜냐하면 특성이란 획득할 수 있는 것이고 따라서 잃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영혼은 자유와 하나입니다. 영혼은 존재와 하나입니다. 영혼은 깨달음과 하나입니다. 사트 - 치트 - 아난다(존재 - 깨달음 - 지복)는 영혼의 본성이자 타고난 권리입니다. 우리가 보는 모든 외형적 존재들은 그것의 표현입니다. 희미하든 뚜렷하든 모든 것은 영혼의 본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신은 ‘스스로 있는 자’이며 초인격적이며 전지하며 ‘아는 자’이며 자연의 지배자이며 모든 것의 주인입니다. 그는 모든 예배의 대상이며, 우리가 알든 모르든 모든 경배는 그에게 드리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봅시다. 경이로운 모든 것 우리가 악이라 부르는 것까지도 신께 드리는 예배입니다.
이것은 자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당신이 악을 행할 때 그 배후의 충동 역시 자유라고 말하겠습니다. 잘못 인도되었고 잘못 이끌렸다 하더라도 그 충동 뒤에는 자유가 있었습니다. 그것 뒤에 자유가 없었다면 어떤 삶이나 충동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자유는 우주의 맥박 안에서 숨을 쉽니다.

우리 안에는 자유롭고 영원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육체가 아닙니다. 마음도 아닙니다. 육체는 매순간 죽어 가고 있습니다. 마음은 끊임없이 변합니다. 육체는 조합이며 마음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육체나 마음은 결코 모든 변화를 넘어선 상태에 이를 수 없습니다. 거친 물질의 일시적인 껍질을 넘어서, 마음이라는 섬세한 덮개를 넘어선 자리에 인간의 참자아인 아트만이 있습니다. 아트만은 영원하며 언제나 자유롭습니다.
자유는 생각과 물질이 켜켜이 쌓인 층을 뚫고 스며 나옵니다. 자신에게 부여된 온갖 이름과 형태에도 제한 받지 않으며 언제나 자신의 존재를 드러냅니다. 아트만의 빛은 무지의 가장 두터운 층도 투과하며 자신의 존재를 느끼게 합니다.
아트만은 불멸, 축복, 평화, 신성이라는 본성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아트만이 인간의 참 모습, 두려움을 모르며 죽음을 초월한 자이며 자유인입니다.

영혼은 늘 울부짖습니다. “자유, 오, 자유!”인간은 완전한 자유의 존재인 신을 상정함으로써 속박에서 영원히 안식할 수 없습니다. 신(자유)을 향한 상승의지를 갖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이러한 도전조차 없다면 그는 자신의 운명이 너무나 가혹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인간은 스스로에게 말합니다. “나는 타고난 노예다. 나는 속박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성상 속박되지 않은 존재가 있다. 그는 자유로우며 자연의 지배자다.”
그러므로 신에 대한 인식은, 속박에 대한 인식만큼이나 필수적이고 근본적인 부분입니다. 둘 다 자유에 대한 갈망이 빚은 결과입니다. 식물조차도 자유에 대한 인식이 없다면 생명이 되지 못합니다.

자유는 성장의 유일한 조건이며 자유를 빼앗기면 퇴화합니다.

자유와 가장 숭고한 사랑은 함께 가야 합니다. 그래야 그 둘 중 어느 것도 속박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자유를 향해 달려갑니다. 우리는 알든 모르든 모두 자유의 목소리를 따라갑니다. 마치 마을 어린이들이 피리 부는 사내의 곡조에 이끌려 가듯, 우리는 모두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그 자유의 곡조를 따라갑니다.
자유의 목소리를 따를 때 우리는 윤리적이 됩니다. 인간의 영혼만이 아니라 가장 낮은 것에서부터 가장 높은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피조물이 자유의 음성을 듣고 그것을 향해 달려갑니다. 그 투쟁 속에서 우리는 더불어 하나가 되기도 하고 길에서 서로를 밀쳐 내기도 합니다. 이렇게 하여 경쟁, 기쁨, 투쟁, 생명, 쾌락, 죽음이 옵니다. 온 우주는 단지 그 목소리에 가 닿으려는 이 맹렬한 몸부림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본성의 발현입니다.

그런 다음에는 어떻게 됩니까? 장면이 변하기 시작합니다. 당신이 그 목소리를 알아듣고 이해하자마자 모든 장면이 바뀝니다. 마야라는 소름끼치는 전투장이었던 바로 그 세상이 이제 선하고 아름다운 낙원으로 변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자연을 저주하지 않으며 세상이 끔찍하다거나 세상 일이 모두 헛되다는 말을 하지 않게 됩니다. 더 이상 눈물도 통곡도 없습니다.
우리가 그 목소리를 알아듣자마자 우리는 왜 이런 투쟁과 싸움, 경쟁, 고난, 잔혹함, 그리고 작은 쾌락과 기쁨이 있어야만 했는지 알게 됩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이 만물의 본성에 들어있음을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없이는 우리에게 운명지어진 것을 얻기 위해 알든 모르든 그 목소리를 향해 나아가는 일이 생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의 삶, 모든 자연은 자유에 이르고자 투쟁하는 것입니다.

가장 위대한 선은 가장 높은 자유입니다.


오직 하나의 목적


우리를 물질의 속박과 사악한 말에서 자유롭게 하는 행위야말로 도덕입니다. 이 세상의 번뇌는 끝이 없어 보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하나의 원 안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원은 출발한 곳으로 돌아갑니다. 원의 시작과 끝은 다시 만납니다. 그래서 세상 어느 곳에 가도 휴식과 평화가 없습니다. 우리는 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삶에서 이루어야 할 오직 하나의 목적이 있다면 그것은 무크티(환영과 무지의 속박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소유해야 할 진정 가치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무크티, 곧 자유입니다.
경전은 말합니다. 하늘의 하늘 위에 올라도 우리는 여전히 노예라고. 당신이 2만 년 동안 왕 노릇을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당신의 육체를 입고 있는 한, 당신이 행복한 노예가 되어 있는 한, 시간이 당신을 구속하는 한, 당신이 공간에 갇혀 있는 한, 당신은 노예입니다. 그러므로 무크티란 육체와 마음의 본성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당신의 발치에 그 본성을 벗어 버리십시오.당신은 그것을 밟고 지나가 그것을 넘어섬으로써 자유롭고 영광스러워져야합니다. 더 이상 삶도 없고 따라서 죽음도 없습니다. 즐거움도 없고 슬픔도 없습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넘어선, 말할 수 없는 지복이며 누구도 깨뜨릴 수 없는 환희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행복이라, 선이라 부르는 것은 이 영원한 지복의 티끌에 지나지 않습니다. 영원한 지복이 우리의 목적입니다.

완전한 집중 속에서 영혼은 거친 육체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알게 됩니다.


욕망, 무지, 불평등 - 이것은 속박의 삼위일체입니다.

인간의 영혼은 더 낮은 형태에 머무를 때도 있고 더 높은 형태에 머무를 수도 있습니다. 영혼은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삼스카라(전생의 행위로 인한 정신의 경향성)를 따라, 혹은 막연한 느낌을 따라갑니다. 그러나 영혼이 자유를 얻을 때는, 오직 인간으로서 가장 높은 형태 속에 머무를 때입니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예배입니다. 왜냐하면 생각은 자유를 얻으려는 활동이며,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행위는 생각에 이끌리기 때문입니다. 다만 자유를 가로막는 행위는 삼가야합니다. 온 우주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신을 경배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신을 저주하고 있는 동안에는 그 사실을 모를 뿐입니다. 저주하고 있는 것 역시 같은 신을 예배하는 다른 형태입니다. 왜냐하면, 저주하고 있는 사람 역시 자유를 향해 투쟁하기 때문입니다.

태어남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이 여행은 산스크리트어로 삼사라(윤회, 문자적으로 탄생과 죽음의 한 바퀴)라 불립니다. 모든 피조물은 이 바퀴를 거쳐 조만간 자유롭게 됩니다.


우주적 외침

우리가 깨달음을 원하는 것은 자신을 자유롭게 하기 위함입니다. 자유를 향한 우주적 외침, 그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자유로워졌을 때 우리는 사회에 대해 분노하거나 타도할 필요도 없으며 자아를 죽이기 위해 숲이나 동굴로 들어갈 필요도 없어집니다. 다만 우리는 있는 자리에 그대로 머무를 것이며, 비로소 전체를 이해할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현상은 그대로이지만 새로운 의미를 띱니다. 우리는 아직 세상을 모릅니다. 우리가 있는 그대로 세상의 모습을 보고 그 본질을 헤아리게 되는 것은 오직 자유를 통해서입니다.
우리는 그때 비로소 본성의 극미한 부분만을 점유했던 소위 법, 운명 혹은 숙명 따위를 보게 됩니다. 그것은 단지 한 쪽 면일 뿐이며, 다른 면에는 언제나 자유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맹수에게 쫓기는 토끼처럼 땅에 얼굴을 묻고 악으로부터 자신을 구하려고 노력했던 것은 이러한 무지 때문이었습니다. 미망으로 인해 우리는 자신의 본성을 잊으려고 해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자유는 언제나 우리를 불렸고, 신들 혹은 외부로부터 자유를 찾았던 것은 모두 진정한 본성에 대한 추구였습니다. 우리는 그 목소리를 잘못 알아들었던 것입니다.

자연의 모든 만물은 원자마다 오직 하나를 외치고 있습니다. 그것은 완전한 자유입니다.

항상 기도하고, 세상의 모든 경전을 다 읽고, 모든 신을 예배한다 할지라도, 당신이 참자아를 깨닫지 못한다면 자유는 없습니다.

우리는 우주 끝까지 간다 할지라도 만족하지 못합니다. 구두쇠가 계속해서 더 많은 돈을 모으고, 강도는 더 많은 강도짓을 일삼고 죄인은 더 중한 죄를 짓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당신이 철학을 배우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모두가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유에 도달하려는 것, 이것 외에 인생에 다른 목적은 없습니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우리는 모두 완전을 향해 분투하고 있습니다. 모든 존재는 반드시 완전에 이르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찾고자 하는 것은 자유이고 그 자유는 바로 신입니다. 다른 모든 것에서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행복의 추구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유한한 것 속에서 행복을 찾을 때는 작은 부스러기밖에 얻을 수 없습니다. 도둑이 물건을 훔칠 때, 그는 신 안에서 행복을 찾는 사람과 똑같은 행복을 얻습니다. 그러나 도둑은 고통 덩어리가 동반된 작은 조각을 얻을 뿐입니다. 진정한 행복은 신입니다. 사랑은 신입니다. 자유는 신입니다. 그리고 속박이 있는 모든 것은 신이 아닙니다.


속박을 끊고

속박에 대한 영혼의 깨어남, 압제에서 일어나 자신을 드러내려는 노력 - 이것이 인생입니다. 이 투쟁에서 성공하는 것을 진화라 부릅니다. 모든 예속이 사라졌을 때 그 최후의 승리를 구원, 니르바나, 자유라 부릅니다.
우주의 모든 것은 자유를 얻고자 싸웁니다. 이름이나 형태에 의해, 시간이나 공간과 인과율에 의해 나의 본성이 묶여 있을 때, 나는 나의 진정한 모습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속박 속에서도 나의 참자아는 완전히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나는 사슬을 잡아당깁니다. 하나씩 하나씩 그것을 끊습니다. 그리고 나는 내면의 위엄을 의식하기 시작합니다. 그런 다음 완전한 자유가 옵니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한 가장 명징하고 완전한 인식에 이릅니다. 나는 내가 무한한 정신이며, 자연의 주인이며 노예가 아님을 압니다. 모든 분화와 결합을 넘어서 공간과 시간과 인과를 넘어서 나는 비로소 ‘참나’가 됩니다.

도달해야 할 목표는 오직 자유입니다. 나는 자유가 자연법에 순종하는 것이라는 사상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 말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인간이 진보해 온 역사에 따르면 진보란 결국 자연에 대한 불복종이었습니다.

삶은 자유에 대한 위대한 선언입니다. 법의 과잉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자유-육체적, 정신적, 영적인 자유-를 향해 나아가는 것, 그리고 그것을 위해 다른 사람들을 돕는 것은 인간 최고의 이상입니다. 이 자유를 위한 길에 가로놓인 사회법들은 인간에게 조금도 유익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자유를 향한 발걸음은 그것들을 서둘러 파괴해야 합니다. 자유의 길에서는 오직 인간을 진보하게 하는 제도만을 장려해야 합니다.

베단타는 무한이 우리의 진정한 본성이라고 가르칩니다. 그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으며 영원히 지속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업으로 스스로의 한계를 짓습니다. 그것은 사슬과 같아서 우리의 목을 묶어 이 한계로 끌어옵니다. 사슬을 끊고 자유로워지십시오. 당신의 발로 법을 짓밟으십시오. 인간의 본성 안에는 법이 없습니다. 운명도 숙명도 없습니다. 어떻게 무한 안에 법이 있을 수 있습니까? 자유는 무한의 다른 이름입니다. 자유는 무한의 본질입니다. 자유는 무한의 타고난 권리입니다. 자유로워지십시오.

그런 다음에는 당신이 좋아하는 어떤 성품도 취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무대에 나와서 거지의 역할을 하는 배우처럼 연기할 것입니다. 그 배우와 실제로 거리를 떠도는 진짜 거지를 비교해 보십시오. 어쩌면, 배경도, 상황도, 말투도 다 똑같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 다른 것이 있습니다!

거지 역할을 하는 배우는 자신이 거지가 된 상황을  즐길  것이나 진짜 거지는 거지로서의 비참함에 고통스러워 할 것입니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들어냅니까? 한 사람은 자유로우나 다른 한 사람은 속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배우는 자신이 거지가 된 상황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그것을 자신의 배역으로 받아들일 뿐입니다. 그러나 진짜 거지는 거지로서의 상태에 너무 익숙해졌고 그래서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 상태를 견디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법입니다.
진정한 본성에 대한 깨달음이 없는 한, 우리는 거지입니다. 그리하여 세상의 모든 세력에 부대끼며 세상 모든 것에 시달립니다. 우리는 온 세상을 향해 도와 달라고 외칩니다. 그러나 아무런 도움도 오지 않습니다. 우리는 상상의 존재에게 외치고 있습니다. 그러니 결코 아무런 응답도 얻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도움이 오리라는 소망을 품고 있습니다. 그래서 울고 흐느끼고 소망하면서 일생이 지나갑니다. 이와 같은 연극이 날마다 계속됩니다.


자유를 향한 몸부림

모든 종교에는 자유를 향한 몸부림이 발견됩니다. 그것은 모든 도덕과 이타심의 토대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스스로를 초라한 몸뚱이라고 여기는 생각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의 머리에 불타는 숯 한 덩어리가 놓여 있다면 그것을 떨쳐버리기 위해 얼마나 몸부림치겠습니까. 인간이 자연의 노예라는 것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자유를 얻기 위해 투쟁하는 모습도 이와 같습니다.

인간은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민주주의와 만인의 평등에 대해 말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모두 평등하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먼저 건강한 두뇌와, 터무니없는 생각으로부터 자유롭고 맑은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마음 깊은 곳의 참자아안에 있는 순수한 진리를 향해, 자신의 마음을 가리는 모든 미신을 뚫고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면 그는 모든 완전함, 모든 능력이 다른 존재에 의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이미 자신의 내면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는 순간 자유를 얻고 평등을 이루게 됩니다. 그는 다른 모든 이들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완전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는 자신의 형제들에게 물리적 정신적 혹은 도덕적인 어떤 능력도 행사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보다 더 낮은 인간이 있다는 생각을 버리게 됩니다. 그때야 그는 평등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전까지는 아닙니다.

만약 당신이 속박당해 있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감금된 채로 남을 것입니다. 당신 스스로 속박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만약 자유로운 존재임을 알게 된다면, 그 순간 당신은 자유롭습니다. 이것이 곧 자유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자유는 모든 만물의 목표입니다.

소망과 바람이 있는 한, 그것은 불완전하다는 분명한 증거입니다. 완전하고 자유로운 존재는 어떤 바람도 갖지 않습니다.

베나레스의 원숭이들은 몸집도 크며 때로는 거칩니다. 어느 날 내가 원숭이들 앞을 지나갈 때 그들은 소리를 지르고 겁을 주며 내 발을 잡아채려 했습니다. 그들이 가까이 다가오자 나는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빨리 달릴수록 원숭이들도 빨리 쫓아왔고 급기야 나를 물어뜯기 시작했습니다.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바로 그때, 저만치서 내게 소리치는 낯선 사내를 보았습니다. “녀석들을 똑바로 쳐다봐!” 나는 고개를 돌려 원숭이들을 쳐다보았습니다. 그들은 뒤로 움찔 물러나더니 마침내 달아났습니다. 그것은 내게 평생 잊을 수 없는 교훈이 되었습니다. 고통을  직시하고 그것에 용감히 맞서라는.
원숭이들처럼 삶의 고난은 우리가 그 앞에서 도망치기를 그만 둘 때 물러갑니다. 자유를 얻고자 한다면 절대로 도망치지 말고 세상과 마주서야 합니다. 겁쟁이는 결코 승자가 될 수 없습니다. 두려움과 고통과 무지가 우리 앞에서 물러나기를 기대한다면 반드시 그것들과 대면하여 싸워야 합니다.

인간의 몸이라는 사원 안에  신이 앉아 있음을 깨달은 순간, 모든 인간 존재에게서 경외를 느끼며, 인간 안에서 신을 본 순간 - 그 순간, 나는 속박에서 자유로워졌습니다. 나를 구속했던 모든 것이 사라지고 나는 자유를 얻었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진다면, 우리는 언제라도 자유롭습니다. 당신은 영혼이며, 자유롭고 영원하며, 영원히 거룩합니다. 믿음을 가지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한 순간에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우리의 유일한 관심은 지고의 진리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가장 고결합니다. 우리는 절대의 깨달음이니 어쩌니 하며 자신에게 큰소리쳤습니다. 그 말을 한번 새겨봅시다.
영혼 위에 서 있는, 영혼 안의 영혼에게 예배합시다. 그 기초가 영혼이 되게 합시다. 그 중심이 영혼이 되게 합시다. 그 정점이 영혼이 되게 합시다. 어느 곳에도 세상은 없을 것입니다. 세상은 놓아 두고 공간 속에서 소용돌이치라고 합시다. 세상은 잊어버리고 오직 영혼 안에 기거하십시오! 그것이 목표입니다. 우리는 아직 목표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을 압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절망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이상을 끌어내리지 마십시오. 당신이 육체라는 생각, 물질로서의 - 죽고 둔하고 지각이 없는 - 생각을 버리고, 자신을 빛나는 불멸의 존재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럴수록, 당신은 물질과 육체와 감각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기를 점점 더 열망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자유를 향한 강렬한 소망입니다.


4. 우리는 모두 하나

당신은 신입니다. 나는 신입니다. 인간은 신입니다.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행하는 자는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신입니다.
높은 곳 어딘가에 앉아 있는 또 다른 신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곳이나 다스리라고 하십시오!


빛나는 각성

모든 나라와 종교의 미신을 뚫고 나온 위대한 생각은, 인간은 신성하며 그 신성이야말로 우리의 본성이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내게 명확하고도 빛나는 각성입니다.

당신이 외부로부터 불변의 존재를 바라볼 때 그것을 신이라 부릅니다. 그리고 내면에서 불변의 존재를 보게 되면 그것을 당신 자신이라 부릅니다. 그러나 그 둘은 하나입니다. 당신으로부터 분리된 신은 있을 수 없으며, 당신보다, 진정 ‘당신’보다 더 높은 신은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신들은 당신보다 작은 존재이며 신, 그리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 대한 사상은 당신 자신의 투영일 뿐입니다. 신은 곧 당신의 이미지입니다.

‘만물이 하나’라는 사상은 인디언 체제 속에서는 일반적인 것입니다. 또한 사람들이 알든 모르든 세상의 모든 제도 속에도 이 사상이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인간의 신성이라 부르는 것이기도 합니다.
세상의 어떤 제도도, 또 진정한 종교라면 인간의 영혼은 본질적으로 순수하며 완전하다는 사상을 담고 있습니다. 그 사상이 어떤 형태로 표현되든, 신과 어떤 관련을 갖고 있든, 신화나 비유, 철학 속에서 어떤 식으로 표현되든, 인간의 영혼은 순수하며 완전합니다. 우리 영혼의 진정한 본성은 행복과 능력이지 약함이나 고통이 아닙니다. 다만 어쩌다가 이 고통이 왔을 뿐입니다.

우리는 신과 영혼, 종교와 구원에 관해 강의를 듣고 책을 읽고 논쟁을 하고 이치를 따집니다. 이것들은 영성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영성은 책이나 이론이나 철학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영성은 배우거나 추론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내적 성장입니다. 앵무새라 할지라도 외우고 반복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학식 있는 사람이 된다면 무엇이 달라집니까? 나귀도 도서관의 책을 다 짊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빛이 올 때는 책으로부터 얻는 배움은 사라질 것입니다. 심지어 자기 이름을 쓸 줄 모르는 사람도 종교적으로 완전한 인간이 될 수 있습니다. 반면, 머리 속에 세상의 모든 도서관을 담고 있는 사람이 종교적 인간이 되는데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학식은 영적 성장의 조건이 아닙니다. 배움이 깨달음의 전제가 될 수 없습니다. 영적인 스승과의 만남, 영적 에너지의 전수가 당신의 영혼을 소생시킬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성장이 시작됩니다. 그것이 바로 불에 의한 진정한 세례입니다.

요가 수행을 하는 사람들은, 인간이 자신의 직접적인 감각-지각을 넘어설 수 있으며 이성 또한 넘어설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그 안에 지성을 초월하는 능력과 힘을 소유하고 있으며 그 능력은 모든 존재, 모든 피조물에 들어 있습니다. 그러한 능력은 수행을 통해 활성화됩니다. 그리하여 인간은 일상적인 이성의 한계를 초월하여, 이성의 영역 너머에 있는 것을 직접 인식하게 됩니다.

당신이 종교적이 되었다는 첫 번째 표시는 명랑해졌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우울해질 때 그것이 소화불량일 수는 있어도 종교적이 된 것은 아닙니다.

나의 소중한 이여, 인생은 짧습니다. 덧없는 세상도 잠깐입니다. 오직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사는 사람들만이 살아 있습니다. 나머지는 살아 있다기보다는 죽음에 더 가깝습니다.

지금까지 윤리학 나름의 역할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미래에도 윤리학은 분명 존재할 것입니다. 그러나 미래의 윤리학은, 외부 세상의 다양성을 말살하고 획일성을 수립하려는 학문이 아닙니다(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죽음과 파멸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통일성을 인식하고, 우리를 위협하는 모든 것 속에서도 신을 인식하며, 외견상 약해 보이는 사람들일지라도 모든 인간의 자질을 무한히 강한 것으로 인식하고, 표면에 드러나는 모든 상반성에도 불구하고 영혼의 영원하고 무한하며 근원적인 순수성을 인식하는 학문이 될 것입니다.


균형 유지하기

어느 예언자가 인간의 상황에 대해 가련함을 느끼자 곧 그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더니 모든 사람에게, 주석산을 마시고, 숯을 씹어 먹고, 재로 덮인 똥무더기 위에 앉아 오직 한탄과 흐느낌을 뱉으라고 청합니다!

우리는 밝고 즐거워야 합니다. 침통한 얼굴은 종교를 만들지 못합니다. 종교는 세상에서 가장 즐거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종교는 최고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종교는 반드시 마음을 순수하게 해야 합니다. 하늘의 왕국은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순수한 자만이 왕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대해 생각하는 동안 그것은 단지 세상일 뿐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대하게 되면 우리는 신을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 일을 즐겁게 바라본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모든 일을 즐겁게 합니다. 그러나 즐거움이 내면의 진리를 가리게 되면, 나는 그것을 그만둡니다.

심각함과 함께 어린아이 같은 천진함을 가지십시오. 모든 것과 조화를 이루며 사십시오.

조화로운 삶을 위해서는 격정의 파도를 잠재워야 합니다. 그것은 모든 진정한 도덕과 마찬가지로, 분노를 위한 분노에 휘말리지 않게 하는 좋은 방책입니다.

순수한 두뇌는 거대한 에너지와 막강한 의지력을 갖습니다. 순수함이 없으면 어떤 영적 능력도 발휘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낙관적인 기질을 개발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에 깃들인 선을 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저 앉아서 육체와 정신의 불완전함을 한탄한다면 무슨 소용입니까? 우리의 영혼을 고양시키는 것은 역경을 극복하려는 영웅적인 노력입니다.

마음은 현혹되기 쉽고 나약하기 짝이 없으며 너무나 쉽게 현상에 이끌립니다. 그러나 마음은 강할 수 있으며, 깨달음의 빛, 곧 우리를 반복되는 죽음에서 구하는 ‘하나임’의 섬광을 포착할 수도 있습니다. 산에 비가 내리면 계곡을 타고 여러 물줄기로 나뉘어 흐르듯이 당신이 이 세상에서 보는 모든 에너지 역시 하나에서 온 것입니다. 그 하나가 마야 위에 다양하게 흘러내린 것입니다. 많은 물줄기를 따라가지 말고 근원인 ‘하나’를 향해 나아가십시오.

우리는 늘 자신의 이상에 따라 다른 사람을 판단합니다. 그것은 잘못입니다. 모든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이상에 의해서가 아니라 저마다 자기만의 이상에 따라 판단되어야 합니다.

처음에는 지성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어떤 것에든 맹목적으로 빠져들어서는 안 됩니다. 수행자는 논쟁의 단계를 거쳐야 하며 그런 연후에 바위와 같이 확고한 결론에 이릅니다.

책은 무수히 많습니다. 시간은 짧습니다. 그러므로 지식을 얻는 비결은 본질적인 것을 취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취하여 그대로 살도록 노력하십시오.

지나친 환락 뒤에는 언제나 슬픔이 잇따르기 마련입니다. 눈물과 웃음은 가까운 친척입니다. 사람들은 너무나 자주 한쪽 끝에서 다른 극단으로 달려갑니다. 마음을 즐거이 하되 평정을 유지하십시오. 지나침으로 달려가지 않도록 하십시오. 모든 지나침은 항상 반작용을 낳습니다.


부정적인 것들을 부정하기

다른 사람을 비판할 때 우리는 어리석게도 자신의 유난히 반짝이는 한 부분을 우리 삶의 전부인 양 여기고 그것을 다른 사람의 삶에서 어두운 부분과 비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늘 잘못 판단하는 오류를 범합니다.

수행자는 생각으로든 말로든 행동으로든 어떤 존재에게도 해를 입혀서는 안 됩니다. 자비는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더 나아가 온 세상을 껴안아야 합니다.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의 결점에 대해 말하지 마십시오. 비판은 아무런 이득도 가져오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의 결점을 지적하는 것으로는 결코 그 사람을 도울 수 없습니다. 당신은 그에게 상처를 주는 동시에 자신에게도 상처를 입히게 됩니다.

사람들이 당신을 욕할 때 그들을 축복하십시오. 당신의 거짓된 자아를 드러내 줌으로써 그들이 얼마나 값진 일을 하고 있나 생각하십시오. 얼른 참자아를 붙드십시오. 오직 순수한 생각을 하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훈계만 일삼는 자들보다 더 많은 것을 이룰 것입니다. 언어의 힘은 순수함과 침묵에서 나옵니다.

인간을 비난하지 말고 신도 원망하지 말며 세상 어느 것도 탓하지 마십시오. 삶이 고통스러울 때면 오히려 자신을 나무라십시오. 그리고 더 나은 행동을 하도록 노력하십시오.

다른 사람들을 비판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자신을 비판해야 합니다. 술주정뱅이를 비난하지 마십시오. 그는 당신의 다른 모습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어둠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서 어둠을 보지 않습니다. 당신이 다른 사람들에게서 보는 것은 바로 당신 자신 안에 갖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것이 세상을 바꾸는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세상을 개혁하려는 사람들이 악을 보고 비판하기보다는, 스스로 악을 창조하는 일을 그만둔다면 세상은 더 나아질 것입니다. 이 사실을 마음에 새기십시오.

다른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든, 순수와 도덕과 신의 사랑에 대한 당신의 기준을 낮추지 마십시오.

세상은 세상의 판단 규범을 갖고 있습니다. 슬프게도 그것은 진리의 규범과는 동떨어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영생을 믿습니다. 그러나 영생이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이 돼지같은 개체성을 버림으로써, 즉 우리 자신을 작은 몸뚱이로 폄하하지 않음으로써 얻어진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영생이란, 우리 자신이 모든 것과 하나임을 아는 것이며 모든 육체 안에 사는 것이며 모든 마음을 통해 인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 외의 다른 육체 안에서도 자신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존재들과 공명하게 되어 있습니다. 무엇이 공감입니까? 공감할 수 있는 대상에 한계가 있습니까? 온 우주를 진정으로 느낄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선하게 되는 법

당신을 이롭게 해야만 나 자신이 선하게 될 수 있습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다른 어떤 방법도 없습니다. 당신은 신입니다. 나는 신입니다. 인간은 신입니다.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행하는 자는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신입니다. 높은 곳 어딘가에 앉아 있는 또 다른 신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곳이나 다스리라고  하십시오!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는 것이야말로 위대한 우주적 종교입니다.
인간은 오직 다른 사람에게 선을 행함으로써 선하게 됩니다.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의무란 다른 사람들을 돕는 것. 세상을 이롭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왜 세상을 이롭게 해야 할까요? 두말할 필요도 없이, 그것은 세상을 돕는 일이 바로 우리 자신을 돕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에게 헌신하는 것은 모든 복의 뿌리입니다.

자신을 드러내려고 동전을 손에 쥐고“옛소, 가엾은 사람.”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가난한 사람이 그곳에 있음을 감사히 여기십시오. 그를 도움으로써 당신 자신을 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복을 얻는 이는 도움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바로 당신입니다.

당신 안에 있는 신성을 드러내십시오. 그러면 모든 것이 신성 주위에 조화롭게 배열될 것입니다.

겁내고 두려워함으로써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줍니다. 상처 입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에 우리는 더 많은 상처를 입습니다. 악을 피하려고 지나치게 노력함으로써 우리는 그 악의 입 속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당신이 강한 사람이라면 더없이 좋습니다. 그러나 당신만큼 강하지 못한 사람들을 비난하지 마십시오. 모든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 같은 사람들에게 화가 미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을 도울 수 없는 내게 화가 미칠지어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이 가진 능력과 수단과 지식에 따라 길을 가고 있습니다. 내가 있는 자리만큼 그들을 끌어올릴 수 없는 자신을 탓하십시오!


동일한 사랑으로

누군가를 특별히 사랑하는 것은 속박이 됩니다. 모든 존재를 똑 같이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모든 욕망이 떨어져 나갈 것입니다.

우리가 눈을 바깥으로 돌려 세상 속에서 보는 우리 모습은 우리의 거울입니다. 이 작은 몸뚱이는 우리가 만들어 낸 작은 거울입니다. 온 우주가 우리의 몸입니다. 우리는 항상 이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우리가 죽을 수 없으며, 다른 사람을 해칠 수도 없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태어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사랑밖에 할 일이 없습니다.

신에 대한 사랑을 품으면 반드시 그 결과로서 우주 만물에 대한 사랑이 따라옵니다. 신에 더 가까이 다가갈수록 우리는 모든 만물이 신 안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게 됩니다. 영혼이 지극히 높은 사랑의 축복을 온전히 누릴 수 있을 때 영혼은 모든 것 안에서 신을 보기 시작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이렇게 하여 사랑의 영원한 토대가 됩니다.

사랑을 위한 사랑은 그것을 느껴 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표현될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느낍니다. 그러나 그 느낌을 표현할 수 있는 사람들은 적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펼치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자신의 사랑과 존중과 연민을 표현할 줄 압니다.

세상은 원칙에 대해서는 거의 마음을 두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초점을 맞춥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의 말은 아무리 터무니없는 것이라 해도 인내를 갖고 듣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의 말은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이 점을 명심하고 당신의 행실을 고치십시오. 그러면 모든 것이 올바른 방향을 잡아 나갈 것입니다. 통치하려 한다면 당신이 먼저 하인이 되십시오. 이것이 진정한 비밀입니다. 당신의 말이 거칠다 할지라도 당신의 사랑이 결국 진실을 드러낼 것입니다. 인간은 어떤 언어의 옷을 입고 있어도 본능적으로 사랑을 느낍니다.

우리는 사상의 자유에 대해 또 서로의 의견 차이에 대해서도 공감해 준다는 호언장담을 듣습니다. 그것은 아주 바람직한 일입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자신이 말하는 것을 무엇이든 믿어 주는 사람에 대해서만 공감합니다. 그가 감히 의견 차이를 보인다면 공감은 사라지고 자취를 감춥니다.

편견은 모든 악의 주된 원인입니다. 다시 말해서 당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누군가를 더 사랑한다는 사실을 드러내 보인다면, 장담하건대 당신은 재난의 씨앗을 심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의 결점들을 참아 주십시오. 수백만의 잘못을 용서하십시오. 당신이 모두를 사심없이 사랑한다면 모두가 점차 서로를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영혼을 신과 같이 생각하고 행동하며, 미워하거나 경멸하거나 헐뜯거나 어떤 방법으로도 상처 입히지 않는 것이 모든 영혼의 의무임을 우리는 믿습니다.


참 스승

참 스승은 즉각 제자의 수준으로 내려올 수 있는 사람이며, 자신의 영혼을 제자의 영혼으로 대체하고, 제자의 눈을 통해 보고 제자의 귀를 통해 듣고 제자의 마음을 통해 이해하는 사람입니다.

어떤 영혼이 종교를 갖기를 간절히 바라면, 곧 종교적 힘의 전달자가 그 영혼을 돕기 위해 반드시 나타납니다.

인격의 조화로운 발전은 어떻게 해서 가장 효과적으로 이루어집니까? 인격이 조화롭게 발전되어 온 사람과 교류함으로써 가능합니다.

신과 그의 가장 위대한 자녀들의 은혜를 구하십시오. 이것은 신에 이르는 중요한 두 가지 방법입니다. 이러한 빛의 자녀들과 교류하는 기회를 얻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들과 5분만 같이 있어도 온 생애를 바꿀 수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간절히 원한다면 그가 당신에게 올 것입니다. 신을 사랑하는 자들과 함께 있으면 그곳이 거룩한 땅이 됩니다. 그들이 신입니다. 그들이 말할 때 그 말은 경전이 됩니다. 그들이 거주했던 장소는 그들의 진동으로 가득 차며, 그곳에 가는 사람들은 그 진동을 느끼고 그들과 마찬가지로 거룩해집니다.

제자는 스승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서양에서 스승은 단지 지식만을 전합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스승과의 관계는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것입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하고 가까운 가족은 나의 스승이며, 그 다음이 어머니이고 다음이 아버지입니다.
내가 첫 번째로 공경하는 대상은 스승입니다. 아버지가 “이렇게 해라.”고 말하고 나의 스승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말한다면, 나는 스승을 따릅니다. 스승은 나의 영혼을 자유롭게 합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내게 이 육체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스승은 내게 영혼의 부활을 주십니다.

스승의 가르침과 당신 자신의 확신을 통해서 보면, 당신은 이름과 형태를 지닌 이 세상이 아니라 세상의 토대가 되는 본질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당신은 창조주로부터 수풀더미에 이르기 까지 온 우주가 자신과 하나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당신은 ‘마음의 매듭이 잘라져 나가고 모든 의심이 사라지는 ’상태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스승은 나를 가르쳐 빛으로 이끌며, 스승 자신이 하나의 고리로서 연결되어 있는 영원의 사슬에 나를 연결합니다.
거리에 있는 사람은 스승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스승은 깨달음을 얻은 자여야 하며, 신의 진리에 거하는 자이고, 자신을 영혼으로 인식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설교만 하는 사람은 스승이 될 수 없습니다.

자아를 위한 진리를 획득하거나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데 필요한 조건은, 마음과 영혼의 순결입니다.

지도자는 초인격적이 되어야 합니다. 나는 당신이 이 점을 이해하리라 확신합니다. 이것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다른 사람들의 헌신을 이용하면서 그 사람 뒤에 숨어서 웃는, 비인격적인 짐승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내가 의미하는 바는,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며, 사랑 속에서 철저히 인간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붓다가 말한 것처럼 ‘많은 사람을 유익하게 하기 위해, 많은 사람의 행복을 위해’ 필요하다면, 자기 손으로 자신의 심장을 잡아 뜯는 능력을 갖는 것입니다. 사랑에 미치십시오. 그러나 사랑에 속박되지는 마십시오.

당신은 이전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가장 위대한 책이며, 존재하는 모든 것을 위탁받은 무한자입니다. 내면의 스승이 열릴 때까지 모든 외부의 가르침은 헛됩니다. 그 가르침들이 가치를 지니려면 내면의 책이 펼쳐져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스승을 알 수 있습니까? 태양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횃불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태양을 보기 위해 촛불을 켜지 않습니다. 태양이 떠오르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태양의 떠오름을 알아차립니다. 스승이 우리에게 도움을 주러 올 때 영혼은 본능적으로 그가 진리를 발견했다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진리는 저절로 드러납니다.
진리를 증명하기 위해 다른 증거물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진리는 스스로 빛납니다. 진리는 우리 본성의 가장 깊숙한 구석까지 꿰뚫고 들어옵니다. 그때 온 우주가 일어서서 말합니다. “이것이 진리다.”

(출처: 크라이온넷)
권은주 
아름다운글..긴 장문의 글을 구구절절이 가슴에 박히도록 잘 읽엇습니다
감사합니다
 (2006/07/25)  
박선향 
음... 그렇군요. 진정한 종교인의 표시는 명랑함인가요.
종교는 없지만, 항상 밝고 당당한 내친구가 떠오르네요. 그이가 참말로 불멸의 존재인가봐요 호호호!!!
 (2006/08/05)  
박성암 
분명 "그 무었"은 나의 내부로 부터 옴니다.아니 온다라기 보다는 "있다"라는표현이 맞을 지도 모릅니다.그 무었을 각성시킬 때 비로소 "그무었"이 거기에 있음을 스스로가
알게 됩니다.알게 된다 보다는 스스로가 그 무었자체로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글은 조금 밖에 보지 않았지만 이미 언제인지 모를 때에 알고 있었던 내용인 듯합니다.
진리의 길은 막연한 그 무었이 주는 답답함 내지는 배고픔을 필요로 합니다.
 (2006/08/27)  
디아나 
너무 좋은 글이네요..^*^ 땅에 내려온 신성-아봐타로 살 수 있는 가르침을 주네요..
 (2006/09/03)
이해영 
참 자아의 실현..많은 고통이 따른후...그 결과물...모두 건강 하세요~!!
 (2008/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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