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내사클럽-HereNow.co.kr

미내사소식

6월 통찰력 및 자기변형게임 진행 공지  2018.06.02
5월 통찰력 및 자기변형게임 진행 공지  2018.05.04
지금여기 23-3호(통권135호 : 2018년 5/6...  2018.05.04

  커뮤니티
ㆍ공지사항
ㆍ최근행사갤러리
ㆍ블로그
ㆍ자연에 말걸기
ㆍ통찰력/자기변형게임
ㆍ어싱커뮤니티
ㆍ자유게시판
ㆍ홍보게시판
ㆍ이웃동네 링크

ㆍ글쓴이  :   피라밋 (2006.03.18 - 13:02)
  건강과 생명력: 힐데가르트 가르침에 따른 권고 2
3. 나는 자연의 일부: 자연으로부터 받는 생명력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도우도록 삼라만상을 - 아무리 깊고 높은 곳에 있는
피조물이라 하더라도 - 손수 창조해 주셨다. 〔즉〕피조물들은 우리의 신체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우리 영혼의 치유를 위해서도 존재하고 있다." (하느님의 창조 작업, 65)

이 구절은 힐데가르트 사유가 전체적 통찰에서 전개되고 있다는 것을 아주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 자연은 우리 신체의 존립과 영혼의 치유를 위해 일하고 있다. 인간에 대한 자연의 섬김, 이는 우연이 아니라 창조주께서 원하신 것이다. 창조주의 의도에 따르면 자연의 어떤 것도 그것 자체를 위해 창조되지는 않았다: 모든 것은 다 인간을 위해 〔창조되어〕존재하고 있다. 〔그래서〕인간은 이성적 언어와 행위로써 하느님의 일을 찬양해야 하는 것이다. 오직 인간만이 하느님의 영상으로서 정신을 소유하고 있어서 자연의 경이로움을 인식할 수 있고,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그 분의 계획하신 바에 따라 행할 수 있다.  

"인간이 자연과 더불어 일하도록 자연 전체가 인간을 섬기고 있다. 자연 없이 인간은 살 수도 존립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창조 작업, 37)

신체를 가진 우리는 흙의 일부로서, 우주 및 (생명력을 주면서 우리를 에워싼) 자연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과 같은 요소들로 (불, 물, 공기, 흙) 구성되어 있다. 힐데가르트는  이 연관성을 다음과 같이 보고 있다:

불은 뇌, 골수 그리고 적혈 안에 있다.            

물은 조직의 액체 및 핏속에 있다.

흙은 인간의 조직과 뼛속에 있다: "육신은 흙으로 만들어져 있고 또 차가운 액체를 가지고 있는데 피가 그것을 따뜻하게 데워 주고 있다; 육신은 피에 의해 데워지지 않는다면 이전의 흙의 상태로 되돌아가고 말 것이다."

공기는 호흡과 이성 안에 있다. "호흡은 영혼의 생동하는 숨결이다. 영혼은 호흡을 감싸고 있으면서 우리가 살기 위해 숨을 들이쉬거나 내 쉴 때마다 호흡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존재는〕자연과 이렇게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기에 자연이 인간을 치유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오는 생명력에 얼마만큼 의존하고 있는지에 대해 힐데가르트는 자연 요법에 관한 책에서 쓰고 있다.

자연 요법에 관한 책들 중 지금까지 두 권, 즉 『Pysika(자연학)』과 『Causae et curae(병의 원인과 치료)』가 전해지고 있다. 지난 세기 아주 큰 반향을 일으킨 소위 "힐데가르트-의학"은 바로 이 두 저서들로부터 발전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 두 저서에 관해서는 원본이 아니라 13세기 이래로 전해오는 필사본만이  전해오고 있다는 것을 비판적으로 주목해야 한다. 힐데가르트 의학에 관한 책들 중에는 전해져 내려오는 자료들을 아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쓰여진 것들이 몇몇 있는데 그것들은 분명 새로 쓰여져야 한다. 특히 마술에 관한 신빙성 없는 부분은 지워져야 한다. 그렇지만 힐데가르트의 처방·지시들 중에는 그 효용성을 아주 잘 확증 받은 것들도 많이 있는데, 이것들은 널리 보급되어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힐데가르트 연구가들은 치료 요법에 관한 그녀 지식의 원천에 관해서도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혹자는 힐데가르트가 수도원의 의학적 장서들을 볼 수 있었고 당시 수도원의 의학적 지식만 소유하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반면, 혹자는 그녀의 의학적 저서들이란 순전히 비전을 통해서만 쓰여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전문가들 또한 힐데가르트의 치료 요법에 관한 지식의 원천에 관해서는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지만, 힐데가르트 자신은 신비적 능력이 없었더라면 이 〔의학적〕지식을 소유하기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여러 군데에서 말하고 있다.

"하느님의 비밀은 파충류나 새, 고기와 같은 동물 속에, 과일 나무나 〔풀이나 꽃과 같은〕식물 속에 아니, 자연 전체 속에 다 숨어 있다. 그러나 이 비밀은 어느 누구도, 어떤 피조물도 감지할 수 없다. 오직 하느님으로부터 특별한 선물을 받은 사람, 그 만이 〔이 큰 〕비밀을 감지할 수 있을 뿐이다."(하느님의 창조 작업, 175)                  

이 말은 〔그런 특별한 선물을 받지 못한〕우리로서는 시행착오를 거듭함으로써만 피조물의 내적 힘을 알 수 있게 된다는 이미 알려져 있는 사실을 되풀이하고 있지 않는가?

〔그러나 힐데가르트 자신은 그 특별한 선물을, 곧〕숨겨진 비밀을 알 수 있는 능력을 하느님으로부터 받았다고 다른 곳에서 말하고 있다:

"성령은 살아있는 샘이다; 하느님은 이 성령을 당신의 모든 작품 속에 분배하셨다. 그들은 이 원천으로부터 살고 있다 ... (신적) 지혜는 ... 소위 배우지 못한 한 여성을 (힐데가르트를 말한다) 통해 여러 것들 속에 내재해 있는 자연의 힘과 다른 깊은 비밀을 드러내 주면서 그의 작품을 관조하고 있다. 이 여성은 그 비밀을 몸이 아주 쇠약해졌을 때 참된 관조(비전)를 통해 통찰했다." (하느님의 창조 작업, 265)

『Liber vitae meritorum(책임감 있는 인간)』의 서문에서도 우리는 그러한 것을 읽을 수 있다: 하나의 참된 관조(비전)가 그녀로 하여금 이 저서에서 "피조물들의 여러 본성들의 내적 본질"을 설명하도록 한 것이다:

나는 힐데가르트의 치료 요법을 상세하게 공부하고 또 실험하면서 다음의 확신을 얻게 되었다: 힐데가르트 또한 당시 의학을 공부한 수도원 여성들이면 누구나 갖추고 있었던 의학적 지식을, 즉 당시 의학적 문헌을 통한 지식뿐만 아니라 당시 민간 의학에 관한 지식 또한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비전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었기에  피조물의 내적 본질과 그것들에 숨어있는 힘들을 인식할 수 있었다. 힐데가르트는 이 모든 것을 바탕으로 하여 독특한, 그야말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독특한 자연학과 치료 요법을 만든 것이다.

힐데가르트의 치료 요법은 비록 많은 비판을 - 자주 비웃음과 악의가 함께 섞여진 - 받고 있지만, 현대 의학의 위기를 볼 때 중요한 가치를 지니지 아닐 수 없다. 힐데가르트의 치료 요법은 〔현대 의학과는〕완전히 다른 뿌리에 근거하고 있으므로〔현대 의학과는〕 완전히 다른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성 힐데가르트의 인식들 중에는 우리의 인식들과 일치되는 것들도 많이 있지만 우리에게 낯선 인식들도 많이 있다. 그것은 우리들이 망각해버린 인식이기도 하고 우리의 습관적 생활 방식과 모순되는 인식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힐데가르트의 가르침에 따라 삶의 방식을 바꾸어 몸과 영혼의 건강을 회복하게 되고 그래서 충만한 삶을 살게 된 사람들이 분명 점점 늘어 가고 있다.

힐데가르트를 참으로 알고 싶으면 우리는 먼저 우리의 습관적 사유 방식과 삶의 방식을 변모시켜야 한다. 예컨대 우리는 현대 의학 및 영양학 이론에 완전히 지배되어 있으므로 치료약이나 음식물을 성분과 작용 물질에 따라 분석하고 그 분석 결과를 고려하여 섭생하는데 아주 습관이 되어 있다: 음식물은 탄수화물, 지방, 무기물, 비타민, 미량 원소 등으로 분석된다. 그리고 우리는 모든 영양소들을 골고루 아주 이상적인 양만큼 섭취할 수 있도록, 이 모든 성분들이 잘 배합될 수 있게 음식물을 요리하고 섭생한다. 이 때 비타민 C를 보충해야 한다면 비타민 C가 든 것이면 무엇이나 다 먹을 수 있다. 예컨대 사과를 먹어도 되고, 배를 먹어도, 또는 살구를 먹어도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성 힐데가르트의 경우는 아주 다르다.

그녀는 모든 피조물들의 내적 본질과 그 속에 숨어 있는 힘들을 알고 있다. 그녀에게 있어서 사과는 배와 같은 과일이 아니다: 익히지 않은 사과는 건강한 사람이 먹으면 괜찮지만 아픈 사람이 먹으면 해롭다; 익히지 않은 배를 너무 많이 먹으면 편두통이 날 수도 있고 또 가슴이 "숨차게" 된다. 힐데가르트는 다른 많은 음식물과 치료약에 대해서도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쓰고 있다. 그러나 위에 언급한 바 있는 저서에서 힐데가르트가 말하고 있듯이, 이러한 것에 관해서는 평범한 인식의 통로로는 결코 알 수가 없다.

사물의 본질이란 - 힐데가르트도 이미 알고 있지만 - 자연 과학적 방법으로는 포착될 수도 없고 또 되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개개의 작용 요소들은 실험실에서 정밀하게 밝혀 질 수 있고, 어떤 의약품이 〔어떤 병에 그리고 과연〕 효능성이 있는지 조차 이 실험실을 통해 확증되어 진다. 그러나 힐데가르트는 이런 방식으로 탐구한 적이 한 번도 없다; 그 당시에는 이런 식의 탐구란 도대체 가능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떤 식물이 도대체 치유력을 가지고 있는지, 있다면 어떤 치유력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실제로 적용해 볼 수 밖에 없었다. - 이 방법은 그 당시 수도원 의학이 흔히 사용하던 것이다. - 그러나 힐데가르트는 사물의 내면을 두루 투시할 수 있었으므로 당시의 지식을 훨씬 능가하는 지식을 갖출 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그녀의 치료 요법은 다른 많은 자연 치료 요법들과 동일하게 취급될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유에서 그녀 치료 요법의 치유 효과에 관해서도 "왜"를 물을 수가 없다. 그 효과성에 대해서는 실제로 적용해 봄으로써만 알게 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과연 믿어야 하는가?"하는 물음은 실제로 이 요법에 관해 아주 자주 제기되는 질문이다. 그러나 치유 효과를 얻기 위해서는 이 요법을 기대감어린 긍정적 태도로 맞이하는 것이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이것은 화학적 의약품의 경우에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힐데가르트의 치료 요법이 다른 모든 자연 치료 요법 및 현대 의학과 본질적으로 구분되는 것은 전체성이라는 점에 있다 하겠다: 자연의 치유력은 신체 및 신체 기관에만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영혼과 정신에도 관계된다. 곧 힐데가르트는 사람의 일면만 아니라 전체를 다 고려하여 처방내리고 있다. 한 생명체의 체액이 분비되는데는 우리의 감정과 사유 또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물론 "체액"이라는 개념은 오늘날 더 이상 사용되고 있지 않고 대신 호르몬, 효소, 분비물 등으로 표현되고 있다.

우리 몸의 체액 분비 과정에는 치료약뿐만 아니라 우리가 일상적으로 먹는 음식물조차 영향을 끼친다. 우리가 어떤 감정 상태에 있게 되는가 하는 것에는 우리가 어떤 곡물로 구워진 빵을 먹는가 또는 어떤 향신료를 넣은 음식물을 먹는가 하는 것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들 중의 누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일까? 힐데가르트가 식물, 나무, 동물, 보석 그리고 그 속에 깃들어 있는 힘에 관해 기술할 때면 신체적 상태나 병적 증상들의 치유만을 결코 문제삼지 않고 항상 인간 전체의 치유를 문제삼고 있다. 여기서 몇 가지 예를 들어 보자.

독일산 밀(딩켈) 아주 중요하고 가치 있는 곡물이다. ""딩켈은 기름기 있고 강한, 가장 훌륭한 곡물이다. 어떤 다른 곡물보다 먹기에 편안하며 건강한 신체와 피를 만들어 주고 또 우리들을 쾌활하고 기쁘게 해 준다. 그것은 강력한 치유력이 있는 좋은 고약처럼 우리의 내면을 치유해준다." 딩켈은 힐데가르트의 치유 요법에서 빠질 수 없는 곡물이다.

귀리 는 훌륭하고 건강한 음식으로 우리의 감정을 즐겁게 하고 우리의 이성을 맑고 명석하게 해 준다. 또 좋은 피부색과 건강한 신체를 가지도록 도와 준다. 신체가 약한 사람들이 먹어야 하는 음식이지만 환자에게 먹여서는 안 된다 (환자는 귀리 죽(오트-밀)
보다 딩켈 수프를 먹어야 한다).      

밀  은 - 물론 통밀의 형태로서만 - 완전한 곡류로 건강한 사람이나 아픈 사람 모두에게 좋다. 그러나 가공한 밀 (하얀 밀)은 우리 신체안에 많은 점액을 분비시키는데 이는 밀기울(겨)도 마찬가지다. 밀기울은 그밖에도 거의 소화되지 않는다.

호밀빵 은 강하여 건강한 사람이 먹으면 좋은 음식이다; 살찐 사람이 먹으면 살이 빠지게 되지만 체력은 강하게 된다. 물론 위가 약한 사람에게는 좋지 못하다.    

밤 나무는 열매도, 목질도, 잎도 다 다양하고 확증된 치유력을 가지고 있다. 열매는 머리, 심장, 간, 비장, 위장이 아픈데 아주 좋다.                  
  
힐데가르트가 건강에 해로운 음식으로 규정한 것도 몇몇 있는데, 딸기, 서양 자두, 파, 돼지 고기, 불 콩 등이 그것들이다.

향신료 는 힐데가르트가 특히 치유제로 추천한 것인데 음식물에 뿌리면 소화를 촉진시킨다: 향신료는 음식물을 자극적으로 만든다. 그러나 너무 다양하거나, 너무 많은 양의 향신료를 한꺼번에 뿌려 맛을 내어서는 안 된다. 너무 많은 향신료는 체액들을 한꺼번에 쏟아지게 하기 때문이다.                

펜셀(회향) 은 아주 추천할 만한 식품이자 향신료이다. 아침에 맑은 정신으로 펜셀 씨앗을 몇 개 씹어 먹으면 몸 속에 나쁜 점액질이나 부패균을 저하시켜 나쁜 호흡을 몰아 내고 또 눈을 아주 밝고 반짝이게 만든다. 뿐만 아니라 펜셀은 우리에게 즐거운 마음과 아름다운 피부 색 그리고 아주 좋은 향기를 갖게 해 주며 소화 또한 잘 시키게 해준다. (펜셀 씨앗을 아침마다 맑은 정신으로 1 작은 술 씹어 먹을 것)

갈간트(Galgant) 는 심장 장애, 순환계 약화, 위장 장애, 풍기 등 다양한 증세에 효과적인 치유제이다. 열이 날 때는 갈간트 분말을 미지근한 물에 태워 마시면 좋다. (2/1 작은 술 분말을 1컵의 물에 태워 아침과 저녁마다 마실 것)

무스카트누스(Muskatnuss): 이것을 향유하면 우리 마음이 열려지고 오관이 정화된다. 그리고 아주 명석한 사유를 하게 된다. (그러나 너무 많이 먹지 말 것!)      

계피: 자주 먹으면 나쁜 체액의 분비를 저하시키고 좋은 체액의 분비를 촉진시킨다.

넬케 향신료(정향): 이것은 수종증이나 내장이 병들었을 때 또 두통에 아주 좋다. (두통이 날 때는 넬케를 통째로 몇 개 씹어 먹는다.)

베트람(Betram): 건강한 사람이 먹으면 아주 좋다. 안에 있는 부패균을 약화시키고 건강한 피를 증진시키며 사유의 능력을 강화시키기 때문이다. 약한 사람이나 아주 힘이 없는 사람 또한 이것을 먹으면 다시 힘을 회복하게 된다.  

쿠베벤 후추: 아주 격앙되었을 때 도움이 된다. 마음을 즐겁게 하고 이성과 본질을 맑고 투명하게 한다.  

"하느님께서 자연 안에 넣어 두신 모든 생명력은 기쁘게 좋은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 준다. 건강한 사람은 내면에 녹색의 생명력을 많이 가진 자이다. 병은  생명력이 부족하거나 결핍된 상태를 말한다. 병이란 곧 생명이 더 이상 활동할 수 없을 때 나타난다. 이때 인간은 시들어 버린다. 우리 인간은 건강을 스스로 돌보고 책임져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이 사용할 수 있고 사용하여야 하는 치유제를 선사하고 계시니 말이다. 우리는 〔이 치유제로써〕우리에게 부족한 것들을 모두 채워야 한다.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일상적 언어 용법 중에는 이를 아주 적절히 표현하고 있는 말이 있다: "네게 부족한 것이 무엇이지?" 요컨대 건강이란 단순히 욕심이 없고 안락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깨지기 쉬운 균형을 늘 새롭게 만드는 과정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하인리히 쉬퍼게스 (Heinrich Schipperges)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건강한 삶은 모든 생명에 내재해 있는 힘을 능동적으로 발휘하는 것이다 ... 생명의 깊은 원천으로부터 영원히 샘솟고 있는 〔힘〕"    

힐데가르트는 우리를 위험에 빠뜨리게 하는 "좋지 못한 것" 또한 많이 알고 있다. 그녀는 인간이란 아주 정복되기 쉽고 약한 존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동시에 창조주께서는 어떤 경우에든 인간을 도우도록 크신 사랑으로 자연을 창조하셨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하느님께 대한 감사와 경외감 그리고 기쁨의 마음은 바로 이러한 것을 알기에 생겨나는 것이다. 또 이 마음에서 하느님의 모든 경이스러운 작품들을 보고 하느님을 찬양하는 마음이 우러나오게 되는 것이다. 자연 전체가 우리들에게 창조주의 위대하심을 보여 준다. 힐데가르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하느님으로부터 아무런 빛도 넘쳐 나오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 분이 영원한 분이심을 알 수 있을까? 어떠한 빛이든 - 그것이 녹색이든, 씨이든, 혹은 꽃이든, 이름다움이든, - 빛을 가지지 않은 피조물은 없다 ... 이른 아침에는 녹색 또한 가장 큰 힘을 가지는데 ... 그러면 풀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 녹색을 아주 맛있게 흠뻑 빨아들인다. 마치 배 고픈 어린 양이 엄마 젖을 맛있게 빨아 들이듯. 낮의 녹색 힘을 끓여 아주 비옥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하루 종일의 더위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의 전체적 치유 과정에는 자연의 치유력을 사용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대하는 것 또한 포함된다. 모든 자연 파괴는 인간 파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은 그 어느 시대보다 우리 시대가, 삶의 자연적 기반이 점점 파괴되어 가고 있는 우리들의 시대가 절실하게 체험하고 있다.

힐데가르트는 우리들의 예언자이기도 하다. 우리를 향해 우리 시대를 비통하게 경고하고 있는 예언자 말이다:                      

"인간이 자연과 더불어 일하도록 자연 전체가 인간을 섬기고 있다. 자연 없이 인간은 살  수도, 존립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 그러나 인간이 자기 위치를 악용해 악행을 저지르면 하느님의 심판이 내려 창조물들이 인간을 벌주게 될 것이다." 우리는 자연의 힘을 창조주의 의미에서 사용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이기적으로 약탈해서는 안 된다. 힐데가르트는 〔모든 피조물의 기본적 구성〕요소들의 애통한 탄식 소리를 듣고 있다:

"아,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달릴 수 없어. 우리 하느님께서 태초에 우리들을 위해 정해 놓으신 그 길을 우리는 끝까지 걸어갈 수 없어. 인간들이 악행을 저질러 우리들을 완전히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야. 마치 물레안에 던져 마구 돌려서 거꾸로 뒤집어 버리듯이 말이야. 아, 우리에게는 이미 페스트처럼 악취가 풍겨나고 있어. 애타게 완전한 정의를 기다려 보지만 끝내 아무 소용이 없어 ... "

하느님께서 대답하시길:

" ... 사람들이 다시 내게로 돌아올 그때까지, 그들에게 시련을 주리라. ... 공기는 너무도 오염되어 사람들은 숨을 들이쉬기 위해 입을 열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다. 〔모든 것을〕 녹색〔으로 생기 있게 만드는〕 생명력도 인간의 눈먼 영혼이 저질러내는 광란, 하느님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저지르는 그 포악한 광란에 의해 시들고 있다. 그들은 오로지 자기들의 쾌락만 쫓으며 외쳐댄다: 당신의 하느님이 어디 있어? 우리가 한 번도 보지도 못한 그 하느님 말이야. 그들에게 나는 대답하노라: 너희들이 씨를 뿌리면 내가 비를 뿌려 그 씨가 움터 나오는 것을 볼 때  ... 그 때 너희들은 나를 밤낮으로 보고 있지 않느냐? 모든 피조물은 창조주를 향해 나아가는데 ... 아, 인간만이 반역을 하고 있구나. " (책임감 있는 인간, 133)

많은 병들은 우리가 더 이상 자연과 더불어 살지 않고 그것에 항거하여 살고 있는 데서 연유된다. 유물론적 세계 이해·인간 이해는 자연의 영혼을 강탈해 버렸고 그래서 자연을 인간들의 포악한 수중에 완전히 맡겨 버리게 되었다. 이제 인간은 어떤 행위를 하거나 그 누구에게도, 그 무엇에 대해서도, 책임감을 느끼지 못한다. 현대인의 사생활 또한 자연으로부터 동 떨어져 있다. 기술화된 세계가 삶의 자연스러운 리듬으로부터 우리들을 멀어지게 한 것이다. 예컨대 전기가 있게 됨으로써 우리의 잠드는 시간과 깨는 시간이 자연〔의 리듬〕과 무관하게 될 수 있어서 그 결과 신체의 균형이 깨어지게 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순진하게 "자연에로 도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존재가 하느님이 창조하신 창조물의 일부분이라는 것, 또 그러한 존재로서 그 창조물에 의지하고 그것과 결부되어 있어서만 살아 갈 수 있다는 것을 깊이 성찰하고 깨닫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만들 수 있다는 광기 어린 생각에 사로잡혀,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요소들과 함께서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자연의 일부분이다. 이 확정된 법칙을 무시할 경우 큰 시련을 받지 않을 수 없는.

자연과 함께 하는 하루가 되기 위한 생활 규칙                    
-성 힐데가르트의 가르침에 따라-


하루의 흐름

아침이면 아침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창문을 활짝 열고 심호흡을 천천히 한 번 한다. 그리고〔기지개 켜듯〕몸을 활짝 펴고 다시 몸의 힘을 다 뺀다.

문 앞이나 발코니 또는 열려진 유리창 앞을 한 번 거닌다: 몸을 힘껏 뻗고는 깊이 숨을 들어 마신다. 나는 숨쉬고 있으므로 살수 있기 때문이다: "호흡은 영혼의 살아있는 숨결, 왜냐하면 호흡을 감싸 안고 있으면서 호흡을 활동하게 하는 것이 바로 영혼이기 때문". 그리고 몇 가지 체조를 하여 신체를 유연하게 만든다.

아침 식사 이전에 가능하면: 성찰하고 찬미 기도 드릴 것...

그 후에 마음을 고요하게 하여 성찰과 아침 기도를 위한 시간을 마련한다. 신앙심 깊은 유대인은 하느님을 찬양하는 기도를 올리는데, 찬미의 기도는 아주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찬미 기도를 통해 나의 하루는 방향과 정신적 지주를 얻게 된다. 시편을 펴 보면 주옥같은 기도를 많이 찾을 수 있는데, 성서를 읽고 묵상하는 것은 영혼의 양식이다. 힐데가르트에 있어서 성서는 일용할 정신적 양식이다. 이 장의 끝에 힐데가르트의 아름다운 찬미 기도가 한편 실려 있다: "그러므로 모든 창조물은 하느님을 찬미하고 있네"

건강을 위한 충고...
그 다음 나는 건강을 위해 무엇인가를 행할 수 있다.

치아를 위해...

전날 저녁 치아를 꼼꼼히 닦았다면 아침에 일어나서 곧 힐데가르트의 충고를 따를 수 있다: "건강하고 튼튼한 치아를 원한다면 아침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곧 차고 깨끗한 물을 입에 넣어 얼마동안 (물이 약간 미지근해 질 때까지) 머금고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치아 주위에 모여 있는 설태가 녹게될 것이다." 이러한 지시는 이미 다양한 방법으로 시험된 것으로 잇몸에 피가 날 경우에도 크게 도움을 주는 방법으로 확증된 것이다.    

눈을 위해...

찬 물로 두 눈을 씻어 내거나, 물에 적신 찬 수건을 눈꺼풀 위에 잠깐동안 얹어 둘 것. 이렇게 하면 두 눈은 상쾌하고 맑게 되어 아침이면 발생되는 시력 저하를 막을 수 있다.

눈을 위해 초록을...

눈이 아주 피곤할 경우, 또는 병을 앓고 난 후나 연로함 때문에 시력이 아주 약해진 경우 다음의 방법대로 하면 아주 좋아 질 것이다: 초록색 벌판이 나올 때까지 걷거나 자동차를 타고 갈 것. 그래서 초록의 벌판에 도착하면 긴장을 풀고 편하게 앉아 심호흡을 할 것. 그리고 어떤 다른 것도 보지 않고 오직 초록의 초원만을 바라볼 것. 눈물 때문인 듯 눈이 촉촉해질 때까지. "초원의 녹색은 눈의 혼탁함을 없애고 다시 깨끗하고 맑은 눈으로 만들어 준다." 그런데 물 또한 초원의 초록과 마찬가지로 눈에 좋다: 당신은 다리 위에 멈춰 서서 물을 내려다보기를 좋아하는가? 물은 우리의 건조함과 시듦을 "촉촉이 적셔주는", 그래서 우리를 다시 살게 해 주는 생기 가득한 좋은 요소이다. 눈이 쇠약한 사람은 "강가로 가거나 큰 통에 신선한 물을 떠서 물방울이 튀기도록 손으로 몇 번 물을 치고는 그 위에 몸을 구부려 눈이 습기를 머금도록 해 준다; 이 습기는 건조해진 눈에 다시 생기를 주어 맑은 눈으로 만들어 준다."

소화를 위해...

아침마다 잠에서 깨면 훌륭한 작용 물질을 듬뿍 함유하고 있는 펜셀 씨앗을 꼭꼭 씹어 먹는다: 5월에서 10월까지 3일마다 한 번씩 아침에 눈떴을 때 베르뭇-엘릭시에르를 먹는다: "베르뭇은 피곤함을 이기게 해 주는 가장 중요한 식품이다."

(베르뭇-엘릭시에르) 요리법

물을 뺀 베르뭇의 신선한 잎에 (기계를 사용하거나, 잎을 잘게 썰어 수건으로 누른다) 1L 백 포도주와 120g 꿀을 넣어 끓인 후 40ml 베르뭇 주스를 섞는다. 그리고는  이 엘릭시에르가 약간 식을 때까지 저어 주고는 완전히 식으면 병에 넣어서 찬 곳에 보관한다. 이 음료는 우울증을 가시게 해 주고 눈을 밝게 해 준다. 또 심장과 간장을 튼튼하게 해 주고 위장을 따뜻하게 해 주며 창자와 신장을 깨끗하게 하여 5월에서 10월까지 3일마다 한 번씩 아침에 눈떴을 때 복용하면 소화가 잘 된다.

아침 식사

힐데가르트가 추천하는 아침 식사 또는 그것을 위한 충고는 오늘 날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과 다소 다르게 여겨지는 것이 많다.

소화 장애만 가지고 있을 뿐 그밖에는 건강하고 튼튼한 사람이라면 아침을 먹지 않고 오전 늦게야 무엇인가 먹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신체가 특히 위장이 따뜻해지며 그 부분의 혈액 순환이 더 잘 된다. 그러나 어린애나 노인 또는 허약한 사람들은 그렇게 오래 기다려 아침을 먹어서는 안 된다.

"아침을 먹고자 하면 위장이 따뜻해지도록 따뜻한 음식을 먹어야지 찬 음식을 먹어서는 결코 안 된다 ... 과일이나 주스 등의 수분을 함유하고 있는 (예컨대 야채 종류) 것은 점액성의 액체를 체내에 발생시켜 체액의 상태를 교란시키므로 하루의 첫 번째 식사인 아침 식사에는 피하는 것이 좋다. 그러한 것들은 무엇을 먹고 난 후에야 먹을 수 있다. 그러면 해롭지 않고 건강한 음식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아침 식사로는 딩켈이나 통밀 또는 귀리로 만든 빵이나 이런 곡류들을 끓여 만든 죽을  먹으면 좋다. 여기 잼이나 펜셀차 또는 딩켈로 만든 커피를 곁들여 먹으면 된다.

오늘 날 우리들이 흔히 아침으로 먹고 있는 로코스트뮈슬리는 (익히지 않은 채 특이한 방법으로 건조시킨 여러 곡물들을 함께 섞은 것으로 우유 등을 부어 먹는다.) 힐데가르트에 의하면 아침 식사로는 아주 적합하지 못하다. 삼켜진 음식은 위장 안에서 충분히 "익혀져야 하기" 때문에 익혀지지 않은 날 것의 음식물은 소화하기가 무척 어렵다. 날것들은 너무 자주 먹어서는 안 되고 샐러드로나 건조한 빵에 얹어서 먹어야 한다.  

식사시간에 대하여

"음식은 반드시 정해진 시간에 먹어야 한다." 매끼 식사 사이에는 무엇인가를 많이 먹어서도 안 되나 위장이 완전히 비어서도 안 된다.

식사 도중에는 적당히 마셔야 한다.

"식사 도중엔 적당히 마셔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영혼과 신체가 아주 묵직하게 되어 소화 장애가 생기게 된다. 그러나 식사하면서 지나치게 많이 마시게 되면 오히려 좋지 못하다."            
많은 것들을 한꺼번에 먹어서는 안 된다. 음식은 지나치게 뜨거워서도 지나치게 매워서도 안 된다. 지나치게 많이 먹어서도 안 되지만 비이성적으로 금식해서도 안 된다. 음식물은 유쾌할 만큼 들어야 한다.

식사 후: 낮잠 자는 것은 우리를 건강하고 상쾌하게 한다. 그러나 식사 후에 곧 누워서는 안 되고 잠시 기다렸다가 누워야 한다: "우리가 잠시 자리에 누우면 피와 살이 성장하게 되어 건강해 질 수 있다."

저녁이면 저녁마다

잠드는 시간과 깨는 시간은 자연의 리듬에 맞추어야 한다: 밤늦도록 깨어 있거나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자서는 안 된다. 잠드는 시간과 깨어있는 시간간의 균형을 잘 지키는 일이 우리를 건강하게 만든다.

잠자고 깨어나는 일에 있어서 인간은 자연의 모델에 따라야 한다. 자연은 낮과 밤으로써 활동할 시간과 휴식 시간을 정해주고 있다.  " ... 지나치게 잠시간이 적거나 지나치게 오래 자는 일은 뇌와 여러 내부 기관들을 약화시킨다. 잠자는 일과 깨어나는 일에 있어서 정해진 규칙을 위반할 경우 우리의 감각 기관 및 나머지 신체들이 다 쇠약해진다."

잠들기 전 오늘 하루를 성찰하는 일에 대해

밤을 맞이 하기 전 울분이나 분노 등의 감정을 깨끗이 씻어 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악몽을 꾸게 되거나 불면의 밤을 보내게 되기 때문이다. 하루를 하느님의 손안에 다 내려 두고 용서를 청해야 한다. 그러나 내게 상처 입힌 사람을 위해서도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고 또 그를 용서해 주어야 한다.

그 밖의 다른 여러 가지 처방법과 식사 요법이 아주 많이 있지만 더 이상 상세히 다룰 수는 없고 이 주제를 다루고 있는 전문 서적들만을 지적해 줄 수밖에 없어도 마지막으로 일러 두어야 할 말이 있다: 힐데가르트에 따르면 자연에 깃들어 있는 치유력은 마음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그녀는 자연의 치유력을 응용하는 것에 대해 지시해 줄 때마다 어떻게 처방·응용해야 하는지 상세하게 일러 주고 있다. 자연의 힘을 잘 이용하려면 우리는 이 지시를 잘 따라야 한다.

힐데가르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여러 가지의 - 자주는 아주 귀한 - 허브, 가루 그리고 향신료는 ... 무질서하게 마음대로 복용할 경우 건강한 사람에게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할뿐더러 심지어는 건강을 해치기도 한다 ... 그것들은 그것들만의 고유한 힘을 적용시킬 수 있는 체액을 만나지 못할 경우에는 ... 나쁜 체액을 감소시킬 뿐 유기체의 힘을 강화시켜 주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명상: 하느님 찬양

"불타오르고 있는 불꽃 - 이는 하느님을 찬양하고 있어."

불꽃은 뜨겁게 살아 숨쉬고 있지. 모든 것을 따뜻하게 데워주면서,  
형체도 없이, 그러나 너무도 강렬하게,
오, 이 매혹적인 광경.
우리 인간이 생각해 낸 것도, 계획해 낸 것도 아닌.

그대는 억제된 힘으로 나를 섬기고 있어.
은은한 빛을 뿌려주는 촛불이 되어 내 어둠을 걷어주고 있어.
아, 창조주를 찬양하고 있는 그대 모습, 나의 심금을 깊이 울리는.

"바람이 불꽃을 흩날리고 있어 - 이는 하느님을 찬양하고 있어."

보이지 않는 숨결, 그러면서
모든 것을 채워주는.
돌풍이 되고 폭풍이 되어 불꽃 안에 달려 들어와
검고 찬 나무에
밝은 빛을 피워 주네.
그대는 바람의 숨결,
정신의 숨결 - 최초의 움직임, 최초의 불타오름
막 타오르고 있는 하느님 찬양.

"음성 안에 언어가 있어 - 이는 하느님을 찬양하고 있어."  

언어가 거하고 있는 음성,
이미 표현된 언어, 음성 안에 감싸여:
이미 노래로 불러진 언어는, 음으로 가득 차여져
모든 피조물의 음과 어우러지네.
온 세상이 음으로 가득 차 있어.
모든 피조물은 그만의 음을 지니고 있지.
그러나 음성은 인간에게만 있어.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누군가에게 말 건네기 위해.
이 음성을 주심에 하느님께 찬양하네.

언어는 들려지지, - 이는 하느님을 찬양하고 있어. "
  
말을 듣는 일,
그것은 고독을 어루만져 주는 달디 단 위로.
고통 속에서 들려오는 한 마디 따뜻한 말은
깊은 상처를 동여 매주고 새로운 용기를 불어넣어 주지.
하느님께서는 말씀에 의해
온 세계를 장엄하게 창조하셨네.
그대 속에 하느님을 찬양하는 음성이 들려 오고 있어.

"그래서 피조물 전부가 하느님을 찬양하고 있어."

4. 아, 이 쾌적함: 내 신체 속에 살고 있는 녹색 생명력, 영혼

건강하다는 것, 상쾌함을 느끼는 것 - 이는 신체와 영혼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 것.

우리는 너무도 쉽게 "영혼"이라는 말을 하곤 한다. 이 개념을 분명하게 정의 내리고 있지 못하면서도 말이다. 심리학조차 - 영혼론 - 오늘날에는 "영혼없는 이론"이라 말해져야 한다. 사실 영혼은 충동, 느낌, 반응, 지적 능력, 무의식적 표현, 태도 유형 등의 영혼의 표현에 의해 정의 내려진다. 그러나 영혼의 본질이 무엇인지는 과학조차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인간 내면의 이 비밀을 표현하기 위해 "black box"라는 말이 채택되기도 했다. -비행 전반에 대한 사항이 기록되어 있는 비행기 기록기에서 따온 말이다. - 비행기의 black box는 사고가 일어났을 경우에만 열어서 읽어보게 된다. 그러나 인간의 영혼은 그 내적 과정이 지금까지도 - 아마 영원히 - 밝혀지고 있지 못하다. 인간의 행위를 결정짓는 것은 하나의 요인이 아니라 여러 가지 요인들이다. 아주  복잡하게 사로 얽혀서 작용하고 있는 요인들: 예컨대 아주 탐스러운 한 조각의 케이크가 내 앞에 놓여 있다고 하자; 눈으로 그 케이크를 삼켜 뇌에 전달하는 것은 자극이다. 그러면 신체적 영역 ("아, 입에 침이 고여."), 감정적 영역 그리고 사유 영역에서 여러 가지 과정이 동시에 진행된다: 맛있게 보이는 케이크를 보고 기뻐하고, 이어 그것을 먹을 생각을 하면서 벌써 기쁨으로 가득차게 된다. 그러나 이성이 (부디!) 그것을 먹어도 된다는 표시를 보내오면 그때 비로소 팔과 손의 근육이 움직여져서 나는 케이크에 손을 대게 된다. 여기서도 우리는 외적 사건들을 탐구하고 시험해보고 또 측정해볼 수 있다. 그러나 내적 과정은 그럴 수 없다. 힐데가르트는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사람의 신체나 행위는 볼 수 있으나 그 사람의 내면에 진행되고 있는 것에 관해서는 아무도 알 수 없고 볼 수 없다."

요컨대 인간에게는 외적인 것과 내적이 것이 공존하고 있다; 외적인 것에는 신체와 신체 기능, 태도가, 내적인 것에는 정신적 생명력과 충동력이 속한다. 힐데가르트는 자연 속에서 힘을 볼 수 있었던 것처럼 인간 내면의 움직임 또한 볼 수 있었다.
  
힐데가르트에 따르면 영혼에는 녹색 힘(생명력)이 내재해 있는데, 이러한 영혼이 육체의 부드러운 조직과 단단한 뼈 그리고 혈관을 두루 관통하고 있다. 영혼은 신체 안에서 신체를 통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성적 영혼은 이런 식으로 모종의 녹색 (생명력)을 지니고 있으면서 그것으로써 신체의 부드러운 조직과 단단한 뼈 그리고 모든 혈관에 두루 스며들고 있다 ... 빵이 화덕에서 구워지고 있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신체의 여러 기능들도 영혼의 불같은 열렬함 속에서 완성에 이르게 된다."  

성 힐데가르트는 영혼의 불같은 힘과 타는 듯한 열렬함이 어떻게 육체의 활동을 완전히 만들어 내는지 그 과정을 빵을 굽는 과정을 비유로 하여 설명하고 있다: "영혼은 (음식물의) 즙을 올바르게 신체 전체에 고루 분배하고는 나머지 것을 썰어 내버린다; 와인 또한 효모로부터 그렇게 걸려진다. 영혼은 그의 신체를 사랑에 넘치는 마음으로 감싸고 있다. 소멸될 수 없는 영원한 사랑으로 결합된 한 쌍의 연인들처럼."

이 영혼은 우리 안에 이미 각인되어 있는 지능으로 전체 유기체를 만들고 있다. 세포 하나하나 마다 "이성적 숨결"이 살고 있으므로 세포 모두는 "이성적으로" 반응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영혼은 신체를 통해 자신을 표현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신체를 보면서 영혼의 모든 활동을 읽어 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영혼-신체 관계에 대한 힐데가르트의 또 하나의 중요한 관점은 신체를 긍정적으로 보고 있는 점이다: "영혼은 자기의 신체를  아름다운 옷이나 좋은 장식품으로 여기고 사랑한다." 즉 신체는 영혼의 옷이다. 여기서는 신체를 경멸하는 이원론적 태도라고는 전연 찾아 볼 수 없다. 이것은 그리스도적 신비가 에게는 결코 당연한 관점이 아닌 것으로, 오늘날의 그리스도적 신학자들 중에서조차 육체를 "영혼의 감옥"이라 말하면서 육체를 경멸하는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힐데가르트에 따르면 육체와 영혼이란 동반자적 관계로 불가분적으로 결부되어 있어, 어느 하나가 없으면 다른 하나가 있을 수 없을 정도이다. 뿐만 아니라 영혼은 〔자기가 그 속에서 뛰놀던〕육체가 죽으면 하늘나라의 예루살렘에서 그와 다시 결합하게 될 것을 간절하게 기다리게 된다.

"영혼은 육체 속에서 창조적으로 활동하는 것을 아주 좋아한다."

이때 힐데가르트는 하느님과의 유사성을 보고 있다: 정신적으로 비밀스럽게 활동하고 계시는, 오직 당신의 작품 안에서만 곧 우주 전체를 통해서만 감지되어 질 수 있는 하느님. 신체가 영혼의 옷이듯이 우주는 하느님의 옷이다. 그러나 이 비밀을 해독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끊임없는 도전이다: "이미 인간의 내면에도 저리 깊은 신비가 도사리고 있거늘 하물며 인간을 창조하신, 저 깊은 비밀을 창조하신 하느님이야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그 누구도, 이 세상에 살고 있는 한은 그 누구도, 이 모든 것이 진실로 어떠한지는 정녕 알 수 없으리 ..." 우리는〔정신 자체가 아니라〕정신적인 것의 물질적 형성체만을 들여다 볼 수 있다는 어찌할 수 없는 사실 앞에 서 있다. 이 때문에 우리는 고전 분투를 하면서 탐구하고 인식하려 노력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정신의 힘이 어떠한지, 우리의 탐구의 한계가 어디에 있는지, 힐데가르트의 말을 들어보자.

살아있는 정신에는 세 가지 힘이 있다.

1. 보고 지각하는 힘:

우리는 생명체의 물체적 현상을 - 식물, 동물, 인간 - 보고 기술할 수 있다.
(의학이나 생물학.)                          

2. 인식과 탐구의 힘:

이성으로 우리는 생명의 과정과 작용에 관해 탐구할 수 있다.
(물리학, 화학, 심리학, 사회학 등)

3. 정신의 본질적 근원에서 샘솟고 있는 힘:

이 힘은 우리가 볼 수도 탐구할 수도 없는 무엇, 즉 우리의 인식 능력을 벗어나는 생명력의 근원이다.

이는 단지 경이감과 경외감을 가득 품고 다가갈 수밖에 없는 신앙과 종교의 영역이다.  
    
이렇듯 영혼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정신의 숨결"로서 본질적으로 우리들에 의해서는 들여다 볼 수 없는 것이다. "영혼은 신체 안에 깃든 녹화의 힘이다; 영혼은 신체에 의해, 신체는 영혼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전체 구조이다."

삶의 모든 과정은 생명력인 영혼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다; 영혼은 "숨결의 움직이는 힘"이고 생명의 숨결이며 신체 안에 "살고 있는 불꽃"으로 우리를 따뜻하게 데워 준다. 영혼은 "살아있는 존재"이기에 우리에게 운동력을 선사한다.

우리 영혼은 천상적이고 정신적인 근원에서 유래하며 우리 육체를 가득 채우고 있다. "육체는 창조된 작품이고 영혼은 육체의 녹색 힘이다. 육체는 이 영혼을 통해 힘차게 자라기 때문이다. 이는 영혼이 육체의 습기에 의해 〔비로소〕열매 맺어 가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 육체와 영혼은 〔이처럼〕실존적으로 상호 의존해 있는 것이다.

녹색의 힘(viriditas), 살아있는 불꽃, 살아있는 존재, 숨결의 움직이는 힘과 같은 비유로써 힐데가르트는 영혼의 작용하는 힘에 관해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영혼이 도대체 무엇인가를 이루어 내기 위해서는 다시 신체를 필요로 한다.

현대 의학과 심리학 또한 신체와 영혼간의 연관 관계를 점점 더 많이 주목하면서 성 힐데가르트의 통찰에 다시 다가서고 있다. 소위 정신-신체 의학이 정착되고 있으며, 지금껏 영혼 적인 것만의 치유 방법에 육체적 움직임〔을 통한 치유 방법〕이 도입되어 심리 치료를 보충하고 있다. 영혼과 육체가 상호 영향을 주고받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제 더 이상 이론의 여지가 없다. 물론 이 연관 관계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이견들이 있고, 더구나 여러 가지 다른 학문들이 제각기 내어놓는 여러 종류의 치유 형식들간에는 참으로 큰 차이가 있지만 말이다. 다른 한편으로 사제-종교적 영역에서도 소위 전체적 방법들이 점점 증가하고 있다. 명상, 정신적 태도의 육체적 표현, 종교적 춤, 전체성을 지향하는 종교 수업 등을 병행하고 있는 전체적 심리 치유 방법 등이 그것들이다.

육체는 우리의 영혼적, 정신적 상태에 아주 민감하게 반응한다. 우리의 감정, 정신 상태가 우리 신체의 "균형 잡힌" 체액에 의존하고 있듯이 말이다. 우리의 사유나 감정, 아니 우리의 모든 태도가 다 육체 속에 표현된다. 영혼은 자주 육체적 징후를 보내면서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무엇이 우리를 우울하게 하고 있는지 등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우리는 〔영혼의〕 이 언어를 배워야 한다 ... 육체적 병적 증세들을 약 한 알로 간단히 없애버리는 것은 결코 지속적 치유가 될 수 없다. 참된 치유를 위해서는 내적 태도가 변화되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 세상의 고난이란 영속적으로는 결코 제거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늘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 오늘날의 일상 언어(독일어) 표현법에는 영혼과 육체간의 긴밀한 연관 관계에 대한 전해오는 민간 지식이 고스란히 녹여 있는 어법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  
  
·그대 자신과 그대의 신체를 고요하게 관찰해 볼 것. 육체가 〔특정한〕 정신적-영혼적 상태, 즉 우리를 우울하게 하거나 어렵게 만들고 있는 상태를 가리킬 때가 자주 있다. 어떻게 이처럼 우울한 상태에 빠지게 된 것인가, 그 원인이 될 만한 것들을 곰곰 생각해 보고 또 의식적으로 스스로에게 물어 보라.

우리는 흔히 말한다:

☆ 목에 〔큰〕 덩어리가 걸려 있어. (의미: 말문이 막혀)

·나는 어떤 것을 말로 표현할 수 없는가?
   나는 그 무엇에 대해 불안한가?

☆ 위장이 체 했어.
   어떤 일을 소화시킬 수가 없어. (의미: 무엇이 못 견디게 싫어)

·나를 아프게 하고 상처를 주는 일이 있는가?
   나는 어떤 문제를 도저히 극복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가?    

☆ 담즙이 끓어올라. (의미: 분노가 끓어올라)

·무엇에 / 그 누구에 대해 나는 몹시 분노하고 있는가?

☆ 그의 냄새를 더 이상 맡을 수 없어. (의미: 그를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어)
☆ 코에 냄새가 가득 해. (의미: 진절머리가 나)
☆ 그에게 기침을 하다. (의미: 그의 청을 들어줄 수 없어)

·이것에 대해 또는 이 사람에 대해 난 더 이상 알고 싶지 않는가?
·난 그와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는가?

☆ 무엇을 더 이상 삼킬 수 없어. (의미: 참을 수 없어)
☆ 공기가 부족해. (의미: 숨이 막혀)

·내가 더 이상 인내할 수 없는 무엇이 있는가?
   나에게 지나친 일을 요구하고 있는가?
   무엇이 나를 몹시 답답하게 죄고 있는가?

☆ 무엇인가 신장까지 오고 있어. (의미: 어떤 일이 내게 극심한 고통을 주고 있어)

·내게 고통을 주고 있는 그 무엇으로부터 나는 자유로울 수 없는가? 그것을 잘라 내어       버릴 수 없는가? 그것으로부터 나를 순화시키지 못하는가?  

☆ 그것은 더 이상 가지 않아. (의미: 더 이상 불가능 해)

·이 막다른 인생의 길에 서서 나는 어떤 탈로도 더 이상 보고 있지 못하는가?

요컨대 나는 〔육체적〕장애를 초래한 원인이 무엇인지 곰곰이 성찰해 보아야 한다. 신체적 고통이란 영혼이 비상 경보를 보내고 있는 신호인 것이다. 나는 그 경보 소리에 귀를 잘 기울여야 한다. 고통을 진통제를 사용하여 간단히 제거해 버리는 것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또 삶의 상황으로부터 도망치는 일이다. 병이란 나로 하여금 자기 성찰을 강요하기 위해  〔영혼이 급히 보내는〕일종의 신호일 수 있다. 병들었을 때 나는 나 자신을 한 전체적 인간으로 문제삼아 보게 된다. 곧 내 삶의 방식 전부를 - 자연적인 영역이나 인간적 영역이나 종교적 영역 모두에 있어서 - 점검하고 치유해 보아야 한다. 물론 어떤 치유 방법 어떤 시도로도 이 세계에 살고 있는 한 겪게 되는 인간의 고통이란 영원히 제거될 수는 없다는 것을 동시에 기억하면서 말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위험에 처해 있다. 감정과 충동과 사유의 혼란에 빠져들 위험, 이로써 병들 위험 말이다.

오늘날 우리들은 아주 유익한 열매를 맺게 해 줄 몇몇의 사유의 전제를 이미 가지고 있음에도 이 통찰 방식을 실천에 옮기고 있지는 못하다. 건강한 사람에게서든 아픈 사람에게서든 우리들은 습관적으로 단순히 신체적 증세들만 눈 여겨 본다. 그러나 이런 이해 방식으로는 인간을 부분적으로만 바라 보는 것이 된다. 사실 의술에서는 병적인 개개의 징후들을 따로 따로 다루면서도 - 환자라는 인간 전체를 치유하려 하지 않고 - 병을 낫게 하는 일도 자주 있다.

힐데가르트는 어떤 사유와 감정이 우리에게 부정적 영향을 끼치게 되는지, 그리고 그것들이 어떤 여러 신체 기관들을 병들게 하는지, 나아가 치유를 위해서는 어떤 태도가 필요한지 아주 분명히 이해하고 있다.          

"영혼이 자기와 신체에게 좋지 못한 무엇을 감지하게 되면 심장과 간장 그리고 혈관을 죄어 버린다. 그래서 심장 주위에 안개와 같은 것이 생겨나게 되고 그것이 심장을 어둡게 휩싸버려 우리는 아주 슬픈 감정에 빠져들게 된다. 그러나 이 슬픔이 지나가면 다시 분노감이 밀려 온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이 슬픔이 도대체 어디로부터 오게 된 것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해할 수 있다: 심장을 엄습한 그 안개 같은 것이 모든 체액 속에 따뜻한 증기를 형성시켜 ... 담즙을 교란시키게 되는데, 이 쓴 담즙으로부터 아무도 모르게 분노감이 생성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분노를 터뜨리지 않고 침묵속에서 견디어 낸다면 이 담즙은 다시 고요하게 된다 ... 안개와 증기 같은 것이 뇌에까지 올라가게 되면  두통이 나게 되고, 그 후 아래 배안으로까지 내려가게 되면 혈관과 내장을 교란시켜 마침내 우리는 미쳐버리게 된다 ... 우리들은 분노에 의해서도 자주 심한 병에 걸리게 되는 것이다." (병의 원인과 치료, 182, 183)

이 글은 영혼과 신체의 불가분성을 아주 응축해서 기술하고 있다. 우리들에게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나 불쾌한 것이 무엇인지 곰곰 생각해 보면 우리는 삶에서 겪게 되는 온갖 어려움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날씨의 격변부터 삶의 불쾌한 상황, 상처, 상실 등등까지. 그것들은 분명히 우리를 슬프게 한다. 〔슬픔에 의해〕타격을 받게 되는 기관은 심장과 간장 그리고 혈관이다. " ... 슬픔으로부터 그러나 분노가 일게 된다." 현대 심리학적으로 표현해 보면: 좌절감에서 공격성이 나타나게 된다. 좌절은 거부나 상처 또는 상실을 의미할 수 있다. 이로 인해 우리는 슬퍼지는데 처음에는 이 슬픔을 인지조차 못하고 있다. 그리고 이 슬픔은 아주 빠르게 분노감을 몰고 오는데, 이 분노는 우리에게 이 고통을 준 그 무엇에 대해 향해진다. 〔이 슬픔은〕언제나 나의 탓이 아니라 그 누구의 탓이고 - 사람이 아닐 경우는 보다 높은 힘을 가진 무엇의 탓이다. 그러다 마침내 우리는 하느님을 슬픔이라는 폭력을 행사한 원흉으로 고발하게 된다. 이 분노는 그런데 담즙을 공격한다. 힐데가르트에 따르면  분노감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얼굴이 창백해지는 사람은 특히 위험해 질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은 분노에 떨다가 신체가 쇠잔해져서 아주 건조해 질 수 있다; 그래서 담즙 주위를 싸고 있는 체액에서 슬픔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힐데가르트는 육체와 영혼간의 상호 작용에 대해 말하고 있다: 분노에 의해 담즙이 교란되면 담즙 주위에 일정한 체액이 형성되는데, 이것이 다시 우리를 슬프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울증이 생기게 되는 과정이라 할 수 있을까? 이 슬픔〔우울증〕이라는 근본 감정은 "우리 내면 속에 의욕 상실과 무감각 그리고 완고함을 생겨나게 하고, 하느님의 은총이 도움의 손길을 서둘러 내밀어 우리를 자유롭게 해 주시지 않는 한, 영혼을 압박하게 된다. 더구나 큰 불행이 덥쳐와 이러한 우울한 감정에 갇히게 되면, 그 감정은 증오감으로 나아가서는 살인적인 큰 격정으로 자주 번지게 된다."(쉬비아스, 74)

여기에 삶의 불운이 어떻게 한 인간의 영혼과 육체를 병들게 할 수 있는지 드라마틱하게 표현되어 있다. 우리를 무엇보다 심하게 마비시키는 것은 분노감이나 증오감과 같은 파괴적 격정들이다. 이것들을 힐데가르트는 "살인적인 격정"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파괴적 감정이 자기 자신에조차 향해지는 일은 드문 일이 아니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해 화가 나!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 나 자신에 대해서 말이야! 이런 경우 우리는 건강하게 치유되기 위해, 그래, 구원되기 위해 우리 자신을 용서할 수 있어야 한다. 파괴적 감정은 우리를 병들게 하여 하느님께서 뜻하신 대로의 우리들로 되어 가는 것을 방해한다.

짧은 성찰을 위한 잠깐 동안의 멈춤

건강하고 마음이 거의 늘 편안하고 고요한 사람이라면 이 성찰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병과 장애로 항상 새롭게, 또는 자주 고통을 받고 있다면 여기 잠시 멈추어 보세요. 도움이 될 것입니다.

☆ 먼저 당신이 처해 있는 삶의 상황에 대해 성찰하기 위해 시간을 내세요. 혹시 고통을 줄 수 있는 무엇과 대면하게 될까봐 두려우세요? 혹시라도 그것과 대면하게 되어 눈물을 흘리게 되더라도, 그래도, 아니, 바로 그 때문에 계속 성찰할 수 있답니다.

☆ 심장병이 있거나 심장에 통증을 느껴서
   순환계의 병으로
   고혈압으로
   혈관의 병으로
   간장이나 담즙의 병으로
   고통을 받고 있나요?

☆ 그렇다면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여 보세요.
   무엇 때문에 가장 슬퍼하고 있나요?
   당신을 상처 입힌 또는 상처 입히게 될 것은 무엇인가요?
   무엇에 대해 분노하고 있나요?
   화가 나도 또는 화나게 되는 일이 있어도
   그것을 드러내고 싶지 않을 때는 또는 드러내서는 안될 때는 언제인가요?

어쩌면 이러한 것을 생각만 해도 신체의 어느 부분이 벌써 아파 오거나 전체 상태가 공략 받고 있다고 벌써 느끼게 될 지도 모르겠어요. 그렇다면 고통의 원인을 찾기 위한 길에 올바르게 들어선 셈이에요: 자기 자신을 아는 일, 그리고 그 인식으로 인해  감정의 엄습을 받는 일, 그것은 치유를 위한 첫 번째 발걸음입니다. 치유를 위해 밟아야 하는 더 이상의 단계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살펴보겠어요. 그러나 당신은 사제나 심리 치료사 또는 당신 말에 귀를 기울어 줄 수 있고 도움을 줄 수 있는 좋은 친구를 찾을 수도 있어요.

힐데가르트는 인간이란 원래 너무도 아름답고 빛나는 신체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그러나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져 감으로써 곧 타락하게 됨으로써 잿빛 피부로 덮여지게 되었다는 것을 어떤 비전을 통해 보았다. 그녀는 영혼이 다음과 같이 비통해하는 것을 들었다:

"나 이방인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아, 죽음의 그늘속에. 나는 어느 길 위를 떠돌고 있는 것인가? 아, 잘못된 길 위를. 무엇이 나를 위로해 주지? 아, 이방의 땅을 헤매고 있는 순례자의 위로. 내게는 천막이 필요해. 별과 해보다 더 밝게 반짝이는 다섯 개의 별들로 장식되어진 천막이. 왜냐하면 나의 천막에는 기울어 가는 해나 빛 바랜 별들이 아니라 천사의 영광스러움이 빛나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야. 그 천막은 황옥이 떠받치고 있고 보석의 벽으로 에워싸여 있어야 해. 그리고 계단은 유리로 만들어져 있고 바닥은 금이 깔려 있어야 해. 나는 하느님께서 건조한 흙덩어리 안으로 보내주신 살아있는 숨결이기에 천사의 벗이어야 해. 그래서 나는 하느님을 알 수 있어야 하고 또 지각할 수 있어야 해. 아, 그러나! ... 내 옷은 갈가리 찢어져 버렸네. 찢어진 옷을 걸친 채 고향에서 추방되어 이 이역의 땅으로 끌려 와 버렸어. 아름다움도 위엄도 찾아 볼 수 없는 이 땅으로 말이야 ..." (쉬비아스 57/59)

인간은 "북쪽으로" 향해 있다. 하느님으로부터 아주 멀어진 독재와 교만이 넘쳐흐르는 곳으로. 그는 전능하고 싶어했다. 영혼과 신체간의 관계는 그 후로 짐스러운 것으로 되어 버려 양자간을 조화롭게 만드는 일이, 곧 보다 명료한 통찰과 확신에 따라 행위하는 것이 자주 어려운 일로 되어 버렸다. 신체와 영혼간의 조화는 힐데가르트에 따르면 - 오늘날 흔히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 세계를 떠나 은둔자처럼 정적을 향유하는 데가 아니라 내 가장 깊은 영혼으로부터 올바르게 느낀 것을 실행하는 데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우리 누구나가 알고 있듯, 이 일이야말로 우리들이 매일 매일 새롭게 직면〔·결정〕해야 할 가장 어려운 무엇이다.

"육체와 영혼이 함께 살아야 하는 한, 그것들은 커다란 갈등 속에 있지 않을 수 없다. 육체가 죄를 지으며 기뻐하는 동안 영혼은 고통을 겪게 되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창조 작업, IV/16)

힐데가르트가 죄라고 말하는 것을 우리 현대인은 새롭게 번역해야 한다. 사도 바오로에 따르면: 확신에서 행하지 않는 모든 행위는 모두 죄이다. 내가 확신하고 있는 것, 그것은 나의 통찰과 의지 그리고 감정으로써 완전하게 긍정할 수 있는 무엇이다. 이때 〔내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될〕최고 모범이 되는 것은, 내 "마음깊이 사랑하고 있는" 하느님의 가르침, 즉 그것으로부터 다른 모든 율법이 따라 나오게 되는 〔근원적 율법,〕 곧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율법이다. 요컨대 죄란 〔善을 인식하기 싫어함, 곧〕선 인식에 대한 의식적 거부이다. 이로써 나는 하느님께서 내 내면에 각인해 놓으신 나의 본질과 과제를 놓쳐 버리게 되는 것이다. "영혼은 천상과 지상의 일에 관한 알음알이를 이미 품고 있다 ... ". 우리는 아주 일상적인 문제들에 직면하여 어떤 결정이 우리와 타자들을 위해 좋은 결정인가를 잘 알게 되듯이, 생의 큰 결정을 내려야 할 경우에도 어떤 결정이 좋은 결정인지를 알게 된다. 그럼에도 이 내적 확신에 따르지 않고 거슬러 행할 때가 있는데, 이 때야말로  죄를 짓는 것이 되는 것이다. 누구나 다 영혼 깊은 곳에서는 무엇이 좋은 (선한) 것인가를 알고 있다. 비록 그 좋은 것을 행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우리가 선에 대한 우리의 확신에 〔곧 양심에〕거슬러 행하게 되면 영혼은 독침을 맞은 것처럼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 된다. 물론 우리 건강도 해쳐 질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선으로 인식한 것을 우리가 행하게 되면, 이는 우리 생명체에 큰 환희로움을 선사하는 것이 된다. 그래, 우리 생명체는 맛있는 향기를 솔솔 풍기며 화덕에서 금방 나온 달콤한 케이크를 보고 기뻐하듯, 그렇게 우리의 선행을 기뻐하는 것이다. 그러나 힐데가르트는 우리 자신에게 지나치게 엄격해서는 안 된다고 자상하게 충고하고 있다. 영혼은 신체와 더불어 선하고 성스러운 일을 행하면서 생명을 살릴 수도 있지만, 동반자인 신체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귀를 잘 기울여 그의 소원을 들어 주기도 해야 한다. "마치 자상한 어머니가 우는 아이를 달래어 다시 방긋 방긋 웃음을 되찾게 해 주듯이, 영혼도 신체가 이 세상의 일을 즐길 때 허락해 주어야 한다 ... 영혼은 이 모든 것을 다 감내하는 데, 이는 육신을 너무 지치지 않게 해 주기 위함이다."

영혼과 육체간의 사랑에 관한 아름다운 그림  

가끔 어렵게 여겨지더라도 다음을 한 번 시도해 보세요.

☆ 올바른 것으로 인식한 것을 행하기.
☆ 확신에 뿌리내리지 않은 어떤 일도 행하지 말 것.
☆ 육체의 요구에 귀를 기울일 것

☆ 자기 자신과 자기 신체에 대해 지나치게 엄격하지 말 것.

진지하게 원하면 이 일들을 해 낼 수 있어요.

결코 무리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생각, 느낌, 의욕은 신체의 도움을 받아 가시적 형상으로 구체화 될 때만 참으로 실현되어 질 수 있다. 힐데가르트는 이를 "작품에 거해 있는 정신"이라 일컫는다; 우리는 〔하느님에 의해〕창조된 작품이지만, 나름대로 다시 창조적으로 행위할 수 있는 그러한 특이한 작품이다: "인간은 신체와 영혼을 가지고 경이로운 일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이 일은 천사도, 순수 정신적 존재도, 순수 자연적 존재인 동물도 할 수 없고,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다.    

인간인 우리는 정신과 육체가 하나 될 때만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낼 수 있다. 오늘 날 거의 모두가 아주 소중한 가치로 받들고 있는 "자아 실현"이란,  사람이나 사물 〔창조계의 모든 존재자〕를 섬기는 과제를 행하는 것과 일치를 이루지 못할 때는 불모의 이기주의나 자아 도취적 자기 숭배로 빠져들게 된다.  

영혼과 육체의 힘이 서로 조화롭게 어우러져 의미 있고 좋은 일을 만들어 낼 때 그때 우리의 삶은 깊은 충만감과 최고의 행복감을 맛보게 된다: "영혼은 육체 안에서 창조적으로 활동하는 것을 아주 좋아한다."
                                
현대 심리학도 육체 속에서 작용하고 있는 영혼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힐데가르트처럼 나무의 비유를 든다.

다음의 명상에서 우리는 우리 내면의 음성에 귀 기울여 보고자 한다. 모든 분주함이나 해야 할 일에서 한 번 완전히 떠나서.

☆ 우리는 우리 영혼이 신체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는지, 또 표현하고자 하는지를 지각하려 한다.    

☆ 우리 생명체의 약한 부분이 어디인가를 감지해 보자.

☆ 당신은 어쩌면 소음, 먼지, 분주함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만 자동차를 이용할 수 있으리라. 자동차를 세워 놓고 걸어 보자. 5분 정도만 걷지 말고.

☆ 공원이나 확 트인 야외 또는 숲을 찾아 가 보자. 혼자 가기 싫으면 누군과와 함께 가도 좋지만 사전에 침묵을 서로 지킬 것을 약속해야 한다. 침묵 속에서만 우리는 소중한 무엇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눈과 귀 그리고 코를 활짝 열고 발아래 흙을 느껴 보자. 그리고 나무 앞에 서서 아래부터 하늘까지 천천히 보자.
  
☆ 다음의 사유 속으로 깊이 들어가 보자.

명상: 나무

나무에 수액이 있듯 육체에는 영혼이 거하고 있지.
나무가 그만의 형체로 자라나듯 영혼에서는 그 만의 힘이 샘솟아 나지."

나는 한 그루 나무와 같아.
나의 나무를 찾으러

공원을, 숲을
천천히 거닐어 보네.
드디어 나의 나무를
찾았어. 수많은 나무들 틈에서.
그들은 아, 어찌 그리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는지,
대지로부터 어떻게 생명수를 길러 내고 있는지,  
얼마나 단단히 대지에 발디디고 커가고 있는지.

아, 나는 대지 위에 어떻게 서 있는가?
대지는 내 좋으신 어머니
그리로 부터 내가 왔고  
그리로 내가 다시 돌아가야 할.
대지, 내 좋으신 어머니.

나의 뿌리는 어디에 있을까?
영혼과 육신을 위해
어릴 때 나는 얼마나 많은 양분을 길러 내었을까?

나무는 위를 향해 서서
위로 오르려 하지, 태양을 바라보면서.
줄기가 그를 단단히 붙들어
생명수를 위로 올려주지:
위로 향함 - 똑바로 서서
생명력으로 가득 채워져서.

가지는 팔을 벌리고 있어, 열고 - 받아들이면서
그의 싹을 띄우고 있어. 공기에 흔들리고 태양열에 데워지면서
높고 멀리 커가지.
하느님께서 미리 정해 놓으신 내적 본질에 따라서.  


NO
글 제 목
글쓴이
등록일
조회
26  망각된 거인의 사상 … ‘정신철학’, 새로운 연대기를 쓰다 김경덕 2016.10.10  946
25  티베탄 펄싱 테라피 김경덕 2016.09.03  1368
24  브루노 그뢰닝(Bruno Groening): 영적 경로를 통한 치유 김경덕 2016.09.03  3382
23  슈타이너의 생애와 발도르프 교육 김경덕 2016.08.05  1722
22  우리는 아직 슈타이너를 모른다 김경덕 2016.08.05  1135
21  [디펙 쵸프라] 의식과 존재, 대상과 우주, 시간의 실체, 변화와 현실 피라밋 2009.03.24  10704
20  [바이런 케이티] 의문시되는 마음에서 무조건적인 사랑.. [1] 피라밋 2008.12.17  4100
19  비베카난다의 근원에 머물기 (합본) - 1 [5] 피라밋 2006.07.22  13373
 건강과 생명력: 힐데가르트 가르침에 따른 권고 2 피라밋 2006.03.18  11529
17  건강과 생명력: 힐데가르트 가르침에 따른 권고 1 피라밋 2006.03.18  11745
16  [대행스님]수행자로서의 마음 자세 [2] 피라밋 2004.07.07  10955
15  관찰의식은 영원한 것입니까? [마하라지] [2] 2007.05.02  11670
14  <마음은 신화일뿐>의 잔잔한 돌풍 [유지 크리슈나무르티] [3] 진사모 2007.05.01  12997
1 [2]

Copyright 1999-2018 Zeroboa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