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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글쓴이  :   피라밋 (2006.03.18 - 12:56)
  건강과 생명력: 힐데가르트 가르침에 따른 권고 1
힐데가르트, 몸과 영혼

- 건강과 생명력: 긍정적 삶을 창조하기 위한 힐데가르트에 따른 권고 -
                    
(Hildegard Strickerschmidt) 지음


목차

1. 서론
2. 나의 사랑, 생명: "녹색의 생명력"
3. 나는 자연의 일부: 자연으로부터 받는 생명력
4. 아, 이 쾌적함: 내 신체 속에 살고 있는 녹색 생명력, 영혼
5. 나의 내면에는 모든 것이 살고 있어: 녹색의 생기를 주는 자기 인식
6. 나는 살고 있어. 무엇보다 기뻐할 수 있으니까: 기쁨의 생명력
7. 나를 행복하게 하는 선행: 덕의 녹색 힘.
8. 다르게 생각하기: 통회는 새로운 삶을 열어주는 힘
9. 나를 살게 해주는 믿음: 인간은 하느님의 힘에 의해 늘 다시금 새로워진다.  
10. 나는 빛을 사랑해: 하느님의 살아 계시는 빛  


1. 서론

힐데가르트 폰 빙엔,  이는 지난 10년 간 그 어떤 이름보다 세인의 주목을 강렬하게 끌었던 이름이다. 그녀의 웅장했던 삶이 이제야 비로소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누구보다 힐데가르트의 정신적 유산들을 많이 그리고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은 아이빙엔(Eibingen)의 성 힐데가르트 수녀원의 수녀님들이지만, 의학사가인 Heinrich Schipperges에 의해서도 그녀의 많은 (신학적, 의학적) 저서들은 번역, 해석되었다. 뿐만 아니라 힐데가르트의 자연 치료에 관한 의학서들을 실행에 옮기는 의사들도 점점 많아지고 있다.

현대인들에게 치유와 건강이 그 어느 때보다 소중한 가치로 되고 있는 만큼, 힐데가르트의 자연 치료는 특히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오늘 날 의료 수준은 의심할 여지 없이 전대 미문의 높이까지 도달해 있다: 〔현대의〕 의학과 약학은 병을 탐구, 진단, 치료하는데 대단히 높은 수준의 전문 지식을 획득하여 과거의 여러 잔혹한 전염병을 이겨내고 또 여러 훌륭한 약품들을 많이 계발시켰다. 우리는 그들의 이 빛나는 공로에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들은 이 훌륭한 현대 의학에 대해 뭔가 석연치 않는 마음을 금하지 않을 수 없으니 무엇 때문일까? 현대 의학은 병의 외적 징후들만을 기계적으로 다루고 의사와 환자간의 인격적, 개인적, 직접적 만남을 점점 더 의료 장치를 매개로 한 간접적, 익명적 만남으로 대체시키고 있다. 더군다나 고도로 효율적인 약조차 바람직하지 않는, 심지어는 심각한 부작용까지 유발시키고 있다.
  
이런 까닭에 한편에서는 자연 치료법에 대한 호감이 점점 늘어가고 있다. (극동 아시아의 지혜에 근거한 여러 가지 자연 치료법에 대해 커다란 관심을 가지고 알아 가고 있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음을 보라.)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이 대체 치료법이 조롱거리로 취급되고 비 과학적이라고 무시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식물 안에 내재하고 있는 치유력에 관해 탐구하고 있는 과학도 있다. 그것은 식물 안에 치유력이 있는지 실험실에서 탐구하고 때로는 참으로 치유력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 내기도 한다. 그래서 자연 치료에 대해 호감을 느끼는 의사들이 점점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힐데가르트와 만나면서 이 여러 다른 입장들이 팽팽하게 대립해 있는 긴장의 장, 그 핵심 속으로 뛰어 들게 된다. 그리고 나는 힐데가르트에 의해 좋은 경험을 한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면 소위 "힐데가르트 바람"은 이미 오래 전에 잠잠해지고 말았을 것이라고 감히 주장하고 싶다.

그러나  여기서 아주 분명히 말해 둘 것이 있다. 성 힐데가르트의 치유법은 여러 가지 자연 치료 요법들 중의 하나로 간단히 자리 매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녀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인간 전체의 치유이다. 그런데 이 "전체적 치유" 란 오늘 날은 거의 유행어가 되다시피한 개념이다. 우리는 이 전체적 치유라는 말을 들으면 유사 치료(Homoeopathie)에서 행하는 자연 〔재료들〕에 의한 치유 방법이나 정신 신체 의학의 이해 방식 같은 것을 주로 생각한다.

그러나 힐데가르트에 있어서는 글자 그대로 전체적 인간이 문제된다: 자연과 결부되어 있으며,  또 신체-영혼이라는 구조로 이루어진 채, 생명의 근원인 신에 의존해 있는 인간 전체.〔즉 전체적 맥락에서 조명된 인간.〕또 힐데가르트의 치유론은 어디까지나 그리스도적 구원론, 치유론이다. 따라서 그녀의 치유론에 입각한 세계및 인간 이해는 다른 문화권의 전통적 치유 방식과도, 순수 자연과학에 근거한 의학과도 다르다.

지난 세기동안 우리의 사회와 삶의 방식에 막중한 영향을 끼친 것은 소위 정밀한 자연 과학 들 이였다. 물질적 세계는 아주 발전되었고 또 전문화되었다. 우리는 인간 정신이 얼마나 놀랄만한 업적을 낳을 수 있는지 지켜보았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다양한 방식의 삶이, 그럼으로써 인간 자체가 심각한 위험에 빠져들고 있음을 고통스럽게 인지해야 했다. 이 위험 현상은 특히 환경과 의학 영역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과학적으로 면밀하게 근거 지워진 영양에 관한 여러 이론들이 쏙쏙 쏟아져 나오고, 위생 관념 및 대비책이 널리 유포되며, 기막히게 효과적인 약품들이 계속해서 소비되고 있는데도 우리들은 행복하지 못하다. 알레르기와 문명병들은 계속해서 증가일로에 있다.

이런 시점에서 우리는 이 시스템 자체를 진지하게 검토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이 모든 의료 행위 배후에는 대체 어떤 인간 이해가 도사리고 있는가? 〔인간에 관한 어떤 이해 방식이 이런 의료 행위를 배태해 낸 것일까?〕인간은 과연 개개 부분들의 합에, 즉 임의적으로 교환·대체 가능한, 한 유기적 생명체 전부를 함께 고려하지 않고도 그것만 따로 떼어서 취급할 수 있는 〔독립된〕개개 부분들의 총체에 불과한가?            

전체성에 대한 요구가, 즉 개개 부분들이 아니라 인격 전체가 치유 과정에서 고려되어야 한다는 소리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이때 어려운 점은 인간의 본질적 핵심이란 유물론적 사유 방식이나 그 사유 방식에 근거한 (오늘 날 통용되고 있는) 방법으로는 결코 파악될 수 없다는 데 있다. 생의 주춧돌이라 할 수 있는 이 본질적 핵심을 우리는 통상적으로 영혼이라 명명한다. 그러나 이것은 지난 세기 Virchow 교수가 "그리도 많은 사체를 해부해 보았지만 어디에서도 영혼을 찾을 수 없었다"라고 말한 후, 오늘 날 더 더욱 논란이 되고 있는 개념이다.

현대 자연 과학의 자식인 심리학조차 그의 방법으로는 지성, 감정, 충동, 태도 등의 영혼의 외적 현상만을 기술하고 시험할 수 있을 뿐이지 영혼의 본질에 대해서는 결코 알지 못한다. Max Thuerkauf 라는 유명한 물리학 교수의 말처럼 정밀한 자연 과학은 자연 중에서 측정 가능한 것만을 확정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측정 가능한 것, 그것은 자연의 아주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이 유물론적 일면적 고찰 방식에 인간 삶의 본질적 측면에 속하는 영적인 것이 아주 결핍해 있음을 느낀다.

이제 힐데가르트의 통찰 방식이 주목받고 있다. 그녀에 있어서 치유란 단순히 병적 증세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전체를 치유함이다. 즉 하느님이 생각하신, 〔 원하신〕 그대로의 그 사람으로 회복되는 것이다: 하느님에 의해, 하느님을 바라면서 살도록 창조된 인간, 세계의 요소들로 빚어졌기에 자연에 의존적이면서도 정신의 숨결로 살고 있기에 이성과 자유로운 의지를 소유하고 있는 인간. 인간은 이처럼 풍요로움을 간직하고 있으므로 건강하게 살면서 자기 자신을 활발하게 실현시켜 갈 수 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인간은〔이 근원적 모습으로부터〕추락하고 분리되어 약해진 존재이기에(destitutio) 하느님의 도움과 구원을 필요로 하는 존재이다.

인간은 〔육체만 또는 영혼만 건강하거나 병드는 것이 아니라, 전체로서 즉 〕인격으로서 건강하거나 또는 병이 들기도 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인격으로서 즉 육체와 영혼의 생명체적 통일성으로서 이해되어져야 하고 또 〔그런 통일체적 존재로서〕진지하게 고려되어야 한다.            

힐데가르트는 그리스도교의 신비가로서 하나의 완결된 세계상(像)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하나의 커다란 연관 관계를 보고 있었는데 그것은 오늘 날 우리들이 전문화, 세분화작업에 점점 몰두함에 따라 잊어 가고 있는 것이다.

초기 중세에 살았던 이 여인이 현대인의 마음을 끄는 점이 바로 이 점에 있으리라. 그녀의 메시지는 그때 그때마다의 사회 구조와 정신적 조류들을 넘어 서는 〔보편적이고〕심오한 진리를 담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보는 자였고 예언자였으며 신비가였다. 그녀를 일컫는 그 밖의 다른 지칭들은 - 독일 최초의 여의사, 자연 치료가. 신학자, 정치가, 시인, 음악가 등 - 오직 이 배경에서만 올바로 자리 매김 될 수 있다.

비전, 너무도 아주 독특하여 오늘날의 연구자들에게 조차 여전히 신비로 남아있는 그 비전을 통해 힐데가르트는 생명의 비밀을 엿볼 수 있었다. 그녀는 스스로를 그림과 상징으로 본 것을 사람들에게 알려 주는 〔아니, 알려 주어야 하는〕"하느님의 나팔"이라 지칭하였다. 그녀는 모든 피조물의 - 생명체나 무생명체나 - "내적 본질"을 보았다. 돌 속에서도 보았고, 동식물 속에서도 보았으며, 인간 속에서도 보았다. 그들 모두는 하나 같이 생명의 근원이신 하느님으로부터 탄생된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힐데가르트 사유가 왜 그토록 현대인의 마음을, 생명의 모든 영역이 점점 세분화·전문화되어감에 따라 생의 방향과 중심 마침내는 자기 자신마저 잃어가고 있는 현대인의 마음을 강렬히 매혹하고 있는지 여기서 그 이유를 찾아 볼 수 있으리라.

그녀는 어떠한 인간학적, 신학적 이론 체계도 확립하지 않았다; 그녀가 본 인간은 항상 구체적 인간 이였다. 즉 살과 피를 가진 인간으로 장엄한 능력을 가진 동시에 고통과 어려움을 또한 겪고 있는 인간 이였다. 여기서 우리는 여성 특유의 강점으로 보이는 하나의 관조 방식에 주목할 수 있다: 여성은 생명을 계속 전승해주고 있기에 생명에 특히 가까이 있다. 그녀의 관심의 핵은 〔죽은 사물이 아니라〕 인간에로, 인격에로 향한다. 또 그녀에게는 정신적·육체적 모성이 살고 있기에 생명은 아주 친숙하다. 반면에 남성에게는 사물적 세계를 형성하는 능력이 있다. 그래서 제 2차 바티칸 회의의 폐회식때 여성에게 주는 다음과 같은 메시지가 공표되었다: "이제 때가 오고 있다. 아니, 때는 이미 왔다. 여성에게 주어진 과제를 수행해야 할 때가, 여성이 사회 속에서 지금껏 소유할 수 없었던 영향력을 행사하고 자기 자신을 실현시키며 힘을 획득해야 할 때가. 그러므로 복음의 정신으로 충만한 여성들은 이 순간, 인류가 전대 미문의 깊은 변화를 의식하고 있는 이 순간, 인류가 그의 목적을 실현하는데 큰 공헌을 할 수 있다." 나는 이와 같은 맥락 속에서도 힐데가르트가 오늘 우리에게 막 행사하기 시작한 영향력을 보고 있다.

힐데가르트는 남성들에게도 이 "어머니의 부드러움"을 가질 것을 간절히 그리고 끊임없이 권유했다: 그녀는 Matthaeus von Lothringen 공작에게 "그대의 할 일은 어린이들을 축복하는 것이지 노예를 훈육하는 일이 아닙니다" 라고 경고한 바 있다. 또 어떤 남성에게는 "어디서거나 한 생명을 만나게 되거든, 그 생명을 보살피시요"라고 말한적도 있다.

현대를 사는 우리들도 경종을 울려주는 사람으로서 힐데가르트를 필요로 한다. 우리 모두는 오늘날 생명이 다양한 방식으로 위기에 처해 있음을 알고 있다. 삶이 - 인간다운 삶, 신이 원하는 삶 - 다시 가능해지기 위해서는 모성과 인간성에 대한 성찰이 아주 불가피하다. 힐데가르트는 생명과 인간을 섬긴다. 그녀는 그녀를 찾아 온 많은 사람들에게 충심 어린 충고를 주었고 정신적·육체적 질환을 치유해 주었으며 또 양심을 일깨워 주었다. 뿐만 아니라 그 당시 권력층 남성들에게조차 따끔한 경고의 말을 자주 주면서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그들의 의무를 생생하게 환기시켜 주었다.

힐데가르트의 웅장한 업적을 볼 때 그녀의 몸이 허약했다는 것, 그래서 자주 병에 시달렸다는 것을 우리는 거의 믿을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러나 그녀는 몸과 영혼이 얼마나 불가분적으로 연관되어 있는지를 〔병고를 통해〕몸소 자주 체험하였다: 정신적, 영혼적 어려움이 어떻게 육체를 병들게 할 수 있으며, 거꾸로 약한 몸이 어떻게 영혼을 방해하는지를. 그럼에도 이 여성은 대체 어디로부터 힘을 얻어 그 엄청난 작품을 이루어 낼 수 있었을까? 그녀는 무엇보다 하느님의 생생한 현존 안에서 살았다. 그녀가 빛으로 그리고 불같은 사랑으로 경험한 하느님, 모든 "녹색의 생명력"을, 우리 인간을 노쇠해서까지 끊임없이 새롭게 만들어 주는 "녹색의 생명력"을 샘솟게 하는 근원적 생명인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나는 이 책에서 성 힐데가르트의 사유를 이해해 보려 한다.

그녀는 "병이란 생명력의 결핍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나는 무엇보다 이 생명력을 느끼고 싶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우리에게 생명력과 건강함 그리고 치유가 주어지는 여러 차원을 조명해 보고 싶다. 그 차원이란 첫번째로는 순수 생물학적 자연적 차원을, 두번째로는 인간 속의 신체적-영혼적 상호 관계를,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모든 생명력의 근원 즉 신 자체를 의미한다.

나의 이 비범한 탐구 여행에 독자 여러분들을 진심으로 초대하면서...


2. 나의 사랑, 생명: "녹색의 생명력"

"하느님으로부터 아무런 빛도 넘쳐 나오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 분이 영원한 분이심을 알 수 있겠는가? 어떠한 빛이든 - 그것이 녹색이든, 씨이든, 혹은 꽃이든, 이름다움이든, - 빛을 가지지 않은 피조물은 어디에도 없다. 빛을 가지지 않았다면 그것은 피조물이 아닌 것이다." (책임감 있는 인간, 5, 84)

건강, 행복 그리고 장수(長壽), 이것은 기념할만한 축일이 오면 우리들이 우리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특히 간절하게 축원하는 것들이다. 충만 되고 좋은 삶을 위한 염려, 그것은 우리에게 능동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힘을 불어 넣어 준다. 삶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 그것이 아마 우리들의 가장 깊고 큰 불안이라 할 수 있으리라.

생명은 하나의 비밀이다. 시대를 관통하여 모든 사람을 매혹하고 씨름하게 한, 그럼에도 결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이다. 우리는 생명 앞에 서면, 예컨대 막 피어나고 있는 꽃 한 송이나 한 마리 동물 또는 막 세상 빛을 본 어린 아이 앞에 서면, 그저 한없는 경탄스러움과 경이스러움에 숨직이며 가만히 두 손을 모을 수밖에 없어 진다. 그 중에도 인간의 생명이 인간 자신에게 가장 큰 수수께끼이리라. 인간은 자기 생명의 근원을 모르면서도 살고 있음을, 살아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생명은 세대를 이어가는 하나의 역동적 과정이다. 개개인은 이 역동적 과정에 그의 생식력에 의해 함께 참여한다. 그러나 이 생명력〔생식력〕은 그에게 선물처럼 주어지는 것이지, 그 스스로 만들어 낼 수는 없는 것이다. 인간은 즉 자기 자신만의 힘으로는 어떤 생명도 창조해 낼 수 없다. 그는 단지 생명을 섬길 수 있을 뿐이다. 생명체를 보호하고 그것의 작용 방식을 탐구할 수 있을 뿐이다: 또는 생명을 악용하고 파괴할 수 있일 뿐이다. 살아있는 세포를 만들어내려는 지금까지의 모든 과학적 시도들은 실패하고 말았다. 인간은 창조적 정신과 숙련된 기술의 힘으로 놀랄만한 많은 것들을 만들어 낼 수 있지만 그것들 모두는 생명이 없는 것들뿐이다. 생명체의 본질적 특성은 변화이자 발전이며 운동이자 따스함이며 환경세계와의 상호 교환이자 호흡이다.

힐데가르트는 생명력을 표현하기 위해 "녹색"이라는 비유를 사용한다. 잔디나 가지 또는 잎의 녹색이 생명의 징표임을 생각할 때 이 비유는 아주 그럴듯하지 않는가? 시든 잎은 이미 죽은 잎이다. 사실상 생물학은 다름 아닌 엽록소(Chlorophyll)가 소위 광합성 과정을 거치면서 햇빛의 도움으로 삶의 에너지를, 삶을 비로소 가능하게 하는 삶의 영양소이자 숨결이라 할 수 있는 에너지를 분출시킨다는 것을 알아내었다. 그러나 녹색은 대체 어디로부터 삶의 에너지를 분출케하는 능력을 얻고 있을까? 이 질문은 과학적으로는 결코 답해 질 수 없다. 힐데가르트는 태초의 인간 또한 녹색의 생명력으로 가득차 있음을 보았다. 그는 건강하고 생기에 넘치는 자연의 힘으로 온통 충만해 있었다. 그러나 〔이 생명력은〕 신으로부터 멀어지면서 시들어 버렸고 그래서 〔인간은〕병과 죽음의 세계로 들어오게 되어 버렸다. 그의 생명력은 그만 계속해서 약해져 버린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힐데가르트의 비전 속에서 아들에게 다음과 같이 비통해 하시며 말씀하신다: "본래는 피조물 모두가 녹색의 생명력으로 넘쳐흘렀으나 ... 녹색 힘 전부는 고갈되어 버렸다." 우주 전체도 인간과 함께 쇠락해져서 변화되어 버렸다. 그래서 우리는 삶을 위험에 처해있는 것으로 체험한다. 정말이지 우리는 삶이 금방이라도 우리들로부터 사라져 버리지 않을까 한 순간도 안심할  수 없다. 병, 장애, 노화, 죽음을 보면서 우리는 어찌 할 바 모르는 채 한없는 무력감에만 휩싸인다; 우리를 넘어서는 어떤 강력한 힘이, 우리가 어떻게도 통제할 수 없는 어떤 힘이 우리 위에 존재하고 있음을 이 순간보다 더 강렬하게 느낄 때는 거의 없으리라. 우리를 넘어서는 이 힘, 범상적 통로로는 경험할 수도, 파악할 수도 없는 이 힘을 우리는 "신"이라 부른다. 그런데 이 엄청난 비밀은 오직 극소수의 사람에게만 그것의 베일 한 자락을 열어 준다. 오직 극소수의 사람만이 이 엄청난 비밀의 한 자락을 엿볼 수 있도록 초대 받은 것이다. 힐데가르트는 이 엄청난 초대장을 받은, 이 엄청난 은총을 받은 극소수중의 한사람이다. 신비가.  

그녀는 생명력의 근원을 하느님안에서, 당신의 정신적 힘으로 모든 것을 존재하도록 하신 하느님안에서 본다. 잠깐 이 위대한 신비가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보자. 그녀는 비전 속에서 하느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

  "나, 불과 같은 최고의 힘은 생명의 모든 불씨를 당겼노라. 죽음과 같은 것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어. ... 나는 지혜로서 삼라만상을 올바르게 질서 지웠다. 나, 신적(神的) 지혜의 불같은 생명은 아름다운 광야 위를 달리면서 그 광야를 온통 점화하고 있어. 나는 강물속에서도 반짝이고, 해와 달 그리고 별들 속에서도 타고 있어. 나는 모든 것을 떠받치고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생명처럼, 온갖 미풍을 불게 하여, 모든 것을 생명의 나라로 초대하고 있어. 공기는 녹색 안에서도 꽃들 안에서도 살고 있어. 물은 마치 생명 있는 것처럼 흐르고 ... 나는 이 모든 것들 속에 불같은 힘으로 숨어 누워 있어.

바람에 따라 이리 저리 흔들리며 타고 있는 불꽃처럼 모든 것은 나를 통해 타고 있어. 마치 호흡이 인간을 끊임없이 움직이게 하듯. 모든 것은 각자의 지혜 속에서 살고 있고 죽음의 그림자라고는 그 속에 흔적조차 없어. 나는 생명이기 때문이야. 나는 또한 울려오는 언어의,  전 창조계를 만든 그 언어의 숨결을 받치고 있는 이성이야. 나는 어떤 것에도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지 않게 모든 것에 삶의 숨결을 불어 넣었어. 나는 생명이므로.

나는 온전하고 건강한 생명(vita integra): 돌로 빚어지지도, 가지로부터 싹트 나오지도, 한 남자의 생식력으로부터 나오지도 않았어. 오히려 이 모든 생명의 뿌리는 내 안에 있어. 이성이야말로 그 뿌리야. 그것으로부터 언어가 울러 퍼지는 ... 나는 도와주면서 섬긴단다. 모든 생명은 나로부터 불타오르기 때문이다. 나는 변함 없이 영원한 생명. 근원도 끝도 없는." (하느님의 창조 작업 25/26)

힐데가르트의 이 관조 방식을 보면 영혼 속의 한 현에서 영롱한 음들이 울려 나오는 듯, 지평은 보다 넓어지고 호흡은 보다 자유롭게 되어짐을 느끼지 않는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우리의 생명이란 신적 삶의 큰 흐름에, 우리의 이 세상 삶과 결코 함께 끝나지 않을 그〔영원한〕흐름에 귀속되어 있다는 것이다. 생명의 궁극적 근원은 바로 여기 〔이 흐름 안에〕있다. 이 근원은 우리가 들여다 볼 수도, 더 이상 캐물어볼 수도 없는 것이다. 그에 반해 우리 자신은 창조된 유한한 생명이다. 우리의 시선을 결코 허용하지 않는 이 정신적 현실, 그것은 믿음에 의해서만 감지될 수 있는 무엇이다.

성 힐데가르트의 이 저서를 읽다보면 아마 아름답고 숭고한 느낌이 우리를 감싸안으리라.. 그럼에도 20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 현대인들에게 그녀는 어쩐지 아주 낯설게 느껴진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습관적으로 유물론적 관점에서, 즉 순수 차안적(此岸的)·자연 과학적 설명 방식으로 바라보고 있다. 정신적-종교적 차원에 관한 물음이나 대답들은 한갖 비과학적인 것으로 간주해 버리면서. 그러나 우리 삶의 근원과 의미에 관한 질문은 결코 과학이 답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은 종교적 질문을 깡그리 배척해 버렸고 급기야는 과학이 많은 사람들에게 종교로 되어 버렸다.

그렇다면 이러한 현상은 우리 삶에 어떤 결과를 초래하고 있는가?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한 보잘것없는 작은 행성에 살고 있는 거주민으로, 즉 무한한 "우주의 한 모퉁이에 살고 있는 유랑인"이나 작은 태양계 안에 갇혀서 우주를 떠돌고 있는 집시같은 존재로 체험할 수 있다. 떠도는 집시의 존재, 그것은 불확실성과 불안감을, 그저 "던져져 있다는" 무의미감을 불러 일으킨다.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발견되는 우울증, 약중독, 알코올 중독등은 다름아닌 이러한 삶의 느낌과 쇠락해가는 삶의 힘의 징후들이리라. 우리와 동시대를 살고 있는 Karlfried Graf Duerckheim이라는 심리치료사는 이 의미 문제를 "주도적 치유"라는 새로운 심리 치유방법에 도입하였다. 그의 의견에 따르면 많은 사람들이 실존에 대해 불안해하고 건강하지 못한 이유는 궁극적으로는 "종교적 토대를 잃어버린 것에 놓여 있다 ... 그들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병적 징후들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본래적 고향의 상실이다 ... 물론 그들이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지만." 요컨대 "보다 위대한 무엇"과 다시 관계를 맺는 것(religio), 그것만이 인간의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정신적-종교적 결핍감이 비교(秘敎)나 뉴 에이지의 돌풍을 몰고 왔을지도 모른다. 이들은 힐데가르트에게서도 그들의 사유를 뒷받침해 줄 여러 유효한 싹들을 찾는다. 그러나 힐데가르트를 그리스도교의 신앙 및 교회로부터 분리시켜 이해하려는 일체의 시도는 분명히 옳지 못하다: 힐데가르트는 우주와 인간 속에 신적인 강한 힘이 작용하고 있기에 인간이란 위대한 능력을 가지고 있으나, 이와 동시에 한없이 약해서〔하느님의〕구원의 손길을 갈급히 요구하는 존재라는 것 또한 알고 있다; 그녀는 이 모든 것을 - 그녀가 말하고 있듯이 - 스스로 안 것이 아니라 비전을 통해서만, 이미 어린 시절부터 그녀 속에 작용하고 있었던 비전을 보는 능력을 통해서만 알게 되었다. 그녀는 〔비전을 볼 때〕 한번도 몰아지경에 빠져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내적 귀로 하늘의 음성을 들었고 내적 눈으로 엄청난 영상들을 본 것이다.          

그녀는 한 웅장한 비전 속에서 인간이 우주의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음을 또 인간의 전체적 실존 방식을 보았다. 인간은 우주 전체의 중심부에 위치 해 있다. "왜냐하면 그는 세계의 구조에 의존하여 존재하고 있는 어떤 다른 피조물보다도 중요한 존재자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가장 높은 분에게 말할 수 없이 소중하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형상에 따라 ... 인간을 만드셨다".(하느님의 창조 작업 III/2)

여기에서 나는 아래의 비전에 관해『하느님의 창조 작업』에 쓰여져 있는 부분들에 한 번 주목해 보려고 한다:

"... 그리고 나는 하느님의 비밀 속에서 너무도 아름다운 영상 하나를 보았다. 그것은 한 남자의 형상 이였다. 그의 얼굴은 너무도 아름답고 투명하여 차라리 이 얼굴보다 햇빛 속을 들여다보는 것이 쉬울 것 같았다. 그의 머리는 황금 띠를 두르고 있었다.

... 그 남자 형상을 하고 있는 존재자가 말하였다: "나, 불과 같은 최고의 힘은 생명의 모든 불씨를 당겼노라. 죽음과 같은 것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어. ... 나는 지혜로서 삼라만상을 올바르게 질서 지웠다. ... 나는 모든 것을 떠받치고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생명처럼, 온갖 미풍을 불게 하여, 모든 것을 생명의 나라로 초대하고 있노라. ...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는 〔너희〕인간을 당신의 형상에 따라 당신과 닮은 존재로 만드셨어. 그리고 인간 안에 인간보다 높은 피조물과 낮은 피조물 모두를 동시에 각인해 두셨어 ...

그대가 지금 바라보는 인간 모습의 아름다운 형상은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보여 주고 있어 ... 하느님의 아들께서는 육신의 옷을 입으시고 잃어버린 인간들을 사랑으로 섬기며 구원하셨기 때문이야. 그래서 그 분의 얼굴은 저리도 아름답고 투명하여 이 얼굴보다 차라리 햇빛 속을 들여다보는 것이 쉽게 여겨지는 것이야 ..."
(하느님의 창조 작업 25/27)


"곧이어 방금 언급한 저 형상의 가슴 부위에 어마어마한 크기의 수레바퀴가 나타났다 ... 그리고 이 큰 수레 안에 인간의 형상이 나타났다 ... 세계의 형태는 하느님이신 진정한 사랑을 알고 있을 때만 영원히 지속하기에: 인간의 본성에 견주어 볼 때 아주 경이로운, 끊임없이 돌고 있는 ...

이는 필시 다음과 같은 것을 뜻한다: 세계 안에 한 인간이 서 있다. "왜냐하면 그는 세계의 구조에 의존하여 존재하고 있는 어떤 다른 피조물보다도 중요한 존재자이기 때문이다. 형태만 본다면 아주 작지만 영혼의 크기로 볼 때는 너무도 거대한 존재. 그의 머리는 위로 향해 있고 발은 단단한 땅위에 대고 있다. 곧 그는 자기 위에 있는 것들뿐만 아니라 자기 아래에 있는 것들 또한 움직일 수 있다. 그가 오른 손 또는 왼손으로 만들어 내는 또는 변모시키는 모든 것은 삼라만상으로 골고루 침투해간다. 그는 자기의 내적 인간의 힘으로 그런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또 다시 나는 하늘의 음성을, 내게 말하고 있는 그 음성을 들었다: 하느님은 당신의 이름을 빛내기 위해 여러 요소들을 종합하여 세계를  만드셨다. 그분은 바람으로써 이 세계를 강하게 만드셨고, 별들과 결부시켜서 이 세계를 빛나게 하셨으며, 나머지 여러 피조물들로 이 세계를 채우셨어 ...  그 분은 인간의 주위를 이 모든 것으로 에워싸게 하심으로 강하게 만드셨단다. 또 인간을 커다란 힘으로 넘쳐 나게 하셨어. 이는 모든 창조계가 그를 도와주게 하기 위함이야 ... 그래서 신앙심 있는 사람은 하느님에 대한 인식 안에서 거하고 있어 ... 인간은 육신의 눈으로 모든 곳에서 피조물을 보고 있듯이, 믿음으로는 모든 곳에서 주님을 본단다 ...

하느님을 아는 자는 세계의 구성물들 역시 경배하지: 태양과 달의 운행, 바람과 공기와 물, 그래, 하느님께서 인간의 명예를 위해 또 그를 보호하기 위해 만드신 모든 것을 다. 인간은 그 외의 것에서는 어떤 단단한 지반도 발견할 수 없단다."(하느님의 창조 작업, 34쪽 이하)

나는 이 비전을 통해 그 어떤 다른 곳에서보다 더 강하게, 인간이란 위대한 본성을 지니고 있느나 위험에 처해 있으므로 구원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힐데가르트 신비설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의 하느님 말씀의 육화(肉化)를 통한 타락하고 쇠약해지고 병든 인간의 구원이다. 그녀의 작품 전체를 꿰뚫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이 신비이다. 이 사실을 사상시켜버리면 힐데가르트를 올바르게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이제 이 비전의 세계로 담대하게 들어가 보자. 문 앞에 서성대면서 논쟁점을 찾으려 하기 보다 마음 문을 활짝 열고 신뢰하는 마음으로 이 세계를 받아 들여 보자. 그러면 우리 생명의 가장 깊은 근원과 마지막 원동력은 결국에는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힐데가르트는 이 사랑을 기술할 적당한 언어를 찾기 위해 씨름했다: "단지 믿는 사람만이  일체의 이해력을 뛰어넘는 이 사랑의 위대함을 깊은 경외감으로 감지하게 되리라 ... 근원도 끝도 없는 신성(神性)의 위대한 선(善)은 믿는 자를 도우기 위해 〔지금도〕서둘러 오고 계신다." (하느님의 창조 작업 27)

여기에는 무의미함, 무력감, 고독한 감정과는 전연 반대되는 무엇이 지배하고 있다: 하느님의 자녀임을 믿음 속에서 아는 것. 이것은 우리 삶의 가장 내밀한 체험에도 상응한다: 나는 사랑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때만, 내 존재가 받아들여지고 이해 받고 있다고 느끼고 있을 때만, 나의 삶이 다른 한 사람에 대해 소중하다는 것을 알고 있을 때만, 오직 그 때만 살아갈 수 있다. 그 때만 잘 살 수 있고 또 기꺼이 살고 싶어한다. 다른 좋은 것들은, 예컨대 우리가 온갖 애를 써서 획득하고자 하는 소유물, 명예, 권력 등은 결국에는 우리 삶의 비본질적 장식품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나게 된다.

땅에서 빚어진 인간은 하느님의 마음 안에서만 편히 쉴 수 있다. 힐데가르트는 그녀에게 허락된 비전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하느님은 그대를 원하시나 그대는 하느님 앞에서 아, 눈을 감아 버리네."

나의 존재란 우연히 또는 누군가의 착오로, 또는 자연의 기분에 따라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는 것과, 그와 대조적으로 나란 영원으로부터 원해졌고 사랑 받아 왔고 또 사랑 받고 있는  "하느님의 거울"같은 존재라고, 그리고 우주 전체는 나를 위해 창조되었다고 믿는 것은 아주 다른 삶의 감정을 일깨운다. "하느님께서 아직 이 세계를 창조하시기 전 이미 인간을 보고 계셨다. 당신께서는 당신의 말씀이 인간이 되어야 함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힐데가르트의 내적 관조는 나의 눈 또한 뜨게 해준다. 그래서 내 생명을 사랑으로써 받아 들여야 함을 보게 해준다.            


★매일의 고요한 시간을 위한 명상
☆ 당신은 스트레스로 고통받고 있습니까?  
☆ 해야 할 모든 일을 처리하는데 힘이 더 이상 충분하지 않다고 느낍니까?
☆ 당신을 - 원하거나 원치 않거나 간에 - 허덕이게 하는 것은 외적인 많은 일들입니까?
☆ 가끔씩 또는 자주, 약이나 술로 그 스트레스를 풀려고 시도해 본 적이 있습니까? T.V 시청이나 음악을 듣지 않은 채 홀로 고요히 지내기가 어렵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다른 길을 걸어야 할 때가 온 것입니다.

☆ 자극을 주는 모든 외적인 것들로부터 먼저 자유로우세요: 음악을 끄고 텔레비전을 끄고 또 전화 벨 소리를 아주 낮추세요.  
☆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고도 한가롭게 - 아무 일도 하지 않고 - 지낼 수 있는 시간을 만드세요. 당신은 그 누구를 위해서건 입을 열어서는 안 됩니다. 가족들 또한 일정한 시간동안 당신을 침묵 속에서 고요히 지낼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합니다. 또는 당신은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고요히 있을 수 있는 장소를 찾습니다.
☆ 비록 낯설게 느껴지더라도 침묵의 처음 몇 분간을 잘 견디세세요. 그러나 이런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이때 처음으로 당신의 내면이 얼마나 들끓고 있는지, 여러 생각들이 어떻게 꼬리를 물고 왔다 갔다 하고 있는지, 당신이 얼마나 끊임없이 "저쪽으로 금방이라도 뛰어가려" 하고 있는지,〔그래서 고요함을 회복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 긴장을 풀고 두 발을 나란히 바닥에 놓고 편안히 앉으세요. 고요히 그리고 깊게 심호흡을 하면서 두 눈을 감으세요. 적어도 20분간 그렇게 고요히 앉아 계세요.
☆ 이런 고요한 시간을 매일의 일과로 만드세요.

각 장의 끝에 실려있는 명상 부분을  주목해서 잘 읽어 보세요. 여기 실린 글을 명상할 수도 있어요. 첫 번째 줄을 세 번 읽고 눈을 감으세요: 그리고 그 문장을 마음속으로 여러 번 반복하세요. 다음의 문장들 모두를 이런 식으로 하나 하나 명상할 수 있답니다.

★명상: 하느님의 생생한 현존

생명임을, 나는 생명임을 느끼네.
두 눈을 감고 내 내면의 음성에 고요히 귀 기울여보면.
숨결이 나를 움직이고 피가 따스하게 나를 데우고 있어.
아, 내 안에 생명의 힘이 뛰놀고 있네.
내가 이처럼 살고 있음에, 살아도 됨에
감사 드리네.

하느님의 현존을 느껴.

생명의 근원은 그 분의 사랑.
성스러운 힐데가르트의 언어로써 그분께 기도 드리네.

당신은 모든 것을 따뜻하게 데워주시는 불의 사랑.
살아있는 정신, 모든 생명 속에 거하시는 생명.
모든 상처를 치유하시는 성스러운 존재.

당신은 위에 살고 있거나 땅위에 살고 있거나
그 모든 피조물을 온통 적시고
헤아릴 수 없이 깊은 곳에 거하시네.
그래, 모든 것은 당신 안에 머물고 있어.
당신을 통해 구름은 시원한 비를 내려주고
어느 듯 저 편으로 날아가지.
당신을 통해 바위로부터 소중한 물이 솟아오르고
샘물이 생겨나 촉촉한 대지는 생기 가득한 녹색을 싹틔우지.

하느님, 당신께서는 당신을 향해 마음의 문을 여는 저희들을
통찰과 지혜,
그리고 깊디깊은 환희로움으로
흠뻑 채워주십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당신을 찬양합니다.
당신은 청량한 찬미
행복을 주는 생명
위로를 주는 희망
강하게 하는 힘.
당신은 저희의 어둠을 밝혀 주시고
빛의 길을 보여 주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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